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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유진룡의 죄, 소오강호

입력 | 2014-07-20 21:55:00

권력 투쟁에서 못 벗어나는 인간세상 비웃을 수 있다면
친박 후보의 인사 청탁 폭로… 비선의 딸 ‘황제 승마’ 의혹… 당당하게 밝히고 책임진다 “소신과 직언 잘못하면 면직”… ‘유진룡 신드롬’ 전설로 남을 판




김순덕 논설실장

김용의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는 강호의 패권다툼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2006년 당시 유진룡 문화관광부 차관은 청와대 인사 청탁을 폭로한 죄로 경질되면서 “심심풀이로 읽은 ‘소오강호’가 떠오른다”며 “참 재미있는 세상”이라고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냈다.

영화화된 ‘동방불패’는 애틋한 애정물 같아졌지만 원작은 피 튀기는 권력싸움이 주제다. 절대무공의 비술을 익히기 위해선 스스로 거세를 해야 한다. 그래서 동방불패 연기는 린칭샤(林靑霞)가 맡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최고 권력자를 보여줬다. 그만큼 독한 자만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권력욕은 성욕보다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엘리트 관료 유진룡의 눈에는 한때 나라를 구하겠다며 떨쳐 일어났던 운동권 386이 집권 후 공기업 자리 때문에 “배 째 드릴까요” 소리를 했네, 안 했네 하는 게 가소로웠을 법하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 2기 내각 인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이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면직이었다.

면직이라니! 부적절한 언행의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도 ‘해임’으로, 성추행 사건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도 ‘경질’로 발표됐다. 이에 비하면 ‘면직’이란 죽을죄를 지어서 잘렸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이 같은 처분을 받았지만 청와대 쪽에서 보면 물타기고, 반대쪽에서 보면 모진 돌 옆에 있다 정 맞은 꼴이다.

인사는 메시지다. 인사권자가 어떤 사람을 원하고 또 원치 않는지를 이보다 명확히 말해주는 것도 없다. 유진룡이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금의환향했을 때 문체부 사람들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맡은 일을 소신 있게 추진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당당한 공무원이 되길 바란다”고 했고 실제로 그런 공무원을 위해 방패막이가 돼주려 애썼다. 나는 유진룡 같은 장관 몇 명만 더 있어도 관료사회가 확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실은 그게 인간 본성이고 권력의 속성일지 모른다. 유진룡이 어떤 죽을죄를 지었는지 복기할수록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유다.

그의 죄는 소신과 직언으로 인사권자를 불편하게 한 죄로 요약된다. 자신이 믿는 바를 감추거나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맞추기는커녕 정치적 좌고우면 없이, 그것도 대통령 앞에서 발설하는 불충을 서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어째서 이 정부에선 내각 총사퇴 같은 ‘쇼’ 한 번 없나, 나는 혼자 개탄했었다. 그런 제안을 한 장관이 있고 그가 바로 유진룡이라는 사실이 면직을 당하고서야 밝혀졌다. 대통령이 “그런 말씀 마시라”며 레이저 눈총을 쏠 때 다른 장관들도 ‘눈치 없이 말을 한다’는 눈빛이었다면 불행한 내각이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은 유진룡에게도 잔인한 달이었다. 11일 “국민생활체육회 사무총장 인사와 관련해 유정복 전 장관에게서 청탁 전화를 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야당의 질문에 그는 “(인사청탁) 얘기는 들었는데 동의할 수 없었다”고 말해 버렸다. 야당에선 새누리당의 인천시장 친박 후보가 체육회에 측근을 심어 6·4지방선거에 이용하려 했다고 난리가 났다. 여권에서 보면 천기누설이었다.

이보다 사흘 전엔 새정치민주연합 안민석 의원이 “대통령 최측근으로 통하는 정윤회 씨의 딸이 승마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고 국회에서 주장했다. 문체부는 근거 없는 의혹이라고 기자 브리핑까지 열었지만 이 일로 유진룡에게 진작 박혔던 미운털은 빠지지 않는 대못이 됐다는 얘기가 나돈다.

두 번째로 문체부를 떠나면서 유진룡은 소오강호를 언급하진 않았다. 그러나 동방불패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임아행이 “누구도 내가 당한 고통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피해의식과 “배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더 독한 최고 권력자가 되고, 강호에선 저마다 이익을 추구할 뿐 정사(正邪)의 구분도 그리 명확한 게 아니라는 김용의 메시지는 내심 곱씹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그는 워낙 문화적이어서 먹고살 걱정은 안 할지 모른다. 권력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세상을 실컷 비웃는 소오강호의 기개도 그래서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관료사회엔 ‘나중에 책임질 일은 손대지 말자’는 ‘변양호 신드롬’이 있다. 앞으로는 ‘유진룡 신드롬’도 한 자리 차지할 것 같다. 소신을 갖지 말 것, 가져도 말하지 말 것, 특히나 인사나 비선(秘線) 문제에선 절대 윗분의 뜻을 거스르지 말 것. 아니면 소오강호에 빠져볼 것.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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