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따구니까지… 진정 네가 좋아 까닭없이 눈물 나려고해 죽을뻔”
이상의 러브레터의 마지막 세 번째 장. 편지 끝 부분에 ‘李箱’(이상)이라는 한자 서명이 보인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 제공
이상
눈을 다시 떴을 때에 거기 ‘정희’는 없다. 물론 여덟시가 지난 뒤였다. 정희는 그리 갔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終生記)는 끝나지 않는다.(이상의 소설 ‘종생기’)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의 러브레터가 처음 발견됐다. 이를 계기로 그의 소설 ‘종생기’에 등장하는 ‘정희’가 연서(戀書)의 주인공인 최정희 작가(1912∼1990)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정희
권 교수는 편지 본문에 시골생활 등이 언급된 걸 감안할 때 이상이 25세이던 1935년 12월에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최정희는 23세의 젊은 이혼녀로 잡지사 삼천리에서 만난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1901∼?)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무대에 섰고, 이후 귀국해 조선일보와 삼천리 기자로 활동했다. 이미 시인 백석에게도 러브레터를 받는 등 젊은 시절 빼어난 외모와 지성으로 청년 문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최정희가 이상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이상은 이 편지를 쓰고 2년 뒤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러브레터는 열정적이면서도 애잔하다. 최정희가 끝내 자신의 구애를 외면하자 이상은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까지 합니다”라고 썼다. 이어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하게 있을 줄을 안다”며 “이제 내 마음도 무한히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라고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상은 편지에서 최정희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차마 전달하지 못한 이전의 편지글을 소개한다면서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는 솔직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편지를 건넬 당시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를 발표한 직후로 문단에서 한창 이름을 알릴 때였다. 그러나 직접 운영한 제비다방이 경영난 끝에 문을 닫고, 연인 금홍과도 이별하는 등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권 교수는 이상의 단편소설 ‘종생기’가 최정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인 정희(貞姬)가 최정희와 이름이 같고, 가족을 위해 일하는 직장여성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소설에선 현실과 정반대로 정희가 주인공 ‘이상 선생’을 사랑하고 러브레터를 보낸 것으로 묘사돼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정희는 다른 남성과 동시에 사귀는 등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권 교수는 “이번 연서의 발견으로 ‘종생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돼 문학사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권 교수는 24일 이상 관련 문학행사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오감도 80주년 기념 특별강연’을 갖고 이상의 러브레터를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정희야, 네 입과 목덜미가…” 李箱의 러브레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