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서 손자며느리에게 더없이 너그러운 시할머니 역을 맡은 박원숙(왼쪽). MBC 제공
왕회장은 실수로 자신의 손자와 ‘원 나이트’를 하고 임신한 미영을 며느리로 적극 영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심으로 아껴준다. 아무리 손이 귀한 집안이라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친정엄마조차 ‘착한 것 빼곤 외모도 몸매도 공부도 별로’라고 평가하는 미영에게 “너처럼 착하고 좋은 애와 인연이 된 건 우리 가문의 복”이라고 덕담을 한다.
그동안 숱한 드라마에서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임신한 여주인공에게 “우리 아들의 걸림돌이 되지 말라”며 두둑한 흰 봉투를 내미는 시어머니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왕회장 같은 시할머니의 등장은 꽤 신선하다.
이런 변화는 드라마 속 ‘재벌남’의 경쟁력이 하락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부모 잘 둔 사장님과 실장님, 이사님 등을 너무 자주 봤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인데 다들 먹고살 만한 시대에 돈 많은 걸 최고 경쟁력으로 내세우는 재벌남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존재가 됐다. 돈이야 많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간 드라마 속 재벌가 어머님들이 여주인공에게 쏟아 부은 별별 굴욕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최근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들은 재벌남 외에 다른 직업군의 왕자님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천재 작곡가 겸 가수(KBS2 ‘트로트의 연인’ 지현우), 인기 추리소설 작가 겸 라디오 DJ(SBS ‘괜찮아, 사랑이야’ 조인성) 등은 최근 등장한 로코 왕자의 직업이다. 결국 재벌남도 돈 외에 새로운 경쟁력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노래를 불러 보든지, 까칠한 성격을 고치든지, 시댁 식구의 태도 변화가 요구된다. 그러니까 사랑받으려면 분발해라, 재벌남.(이렇게 써놓고 묘한 통쾌감이 드는 건 왜지….)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