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국제부 기자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3년째로 접어들자 연합군 리더 영국은 애가 탔다. 독일 잠수함이 곳곳에서 연합군 함선을 격침했지만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안 단속도 힘겨워 큰 도움이 못 됐다. 유대 자본의 힘이 절실했던 영국 외교장관 아서 밸푸어는 1917년 7월 유대계 거부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유대 독립국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이다.
문제는 영국이 세 다리를 걸쳤다는 점. 영국은 독일 편인 오스만튀르크를 교란하기 위해 오스만 치하의 팔레스타인에도 독립을 약속했다. 같은 편 프랑스와는 전쟁 뒤 두 나라가 중동을 나눠먹자는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맺었다. 일종의 삼중 사기다. 밸푸어가 뛰어난 외교관일 순 있어도 훌륭한 인간은 아닌 이유다. 식민통치에 대한 관점으로는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조차 “밸푸어는 도덕적이지만 사악하다”고 했다.
가자지구 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언론도 앞다퉈 이를 보도한다. 각종 소셜미디어에도 피해자들의 참혹한 사진이 시시각각 등장한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너무 피상적이다. 한국형 ‘아이언 돔(이스라엘의 미사일방어체제)’ 도입이 절실하다느니, ‘한국인과 유대인은 교육열이 남다르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25%를 차지하는 그들의 저력을 본받자’느니 하는 글을 볼 때마다 피해자의 아픔보다 가해자의 물질적 성공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트위터의 ‘리트윗’ 버튼을 누르는 손길 또한 피로 흥건한 참상을 구경거리로 여기는 것 같다면 과장일까.
힘의 논리를 무시한 순진한 발상이라고, 먹고살기 바쁜데 지구 반대편 비극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는 알아도 ‘나크바’를 모르는 이가 태반인데 이 정도 관심이 어디냐는 반박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구 먼 곳에서 일어난 사소한 사건이 우리 삶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강대국 간 땅따먹기로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한국 현대사가 그 증거 아닌가. 기계적 중립 혹은 이스라엘 편향이 아닌, 팔레스타인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시선이 필요한 때다. 이런 노력이 당장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해도.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