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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아홉 살짜리 딸과의 약속

입력 | 2014-08-01 03:00:00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인 증자(曾子)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어린 아들이 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다. 엄마가 “얌전히 기다리면 다녀와서 돼지를 잡아 요리해 주겠다”는 말로 달래놓고 장에 갔다 오니 증자가 소중한 돼지를 잡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내는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남편은 “자식에게 속임수를 가르쳐선 안 된다”며 손을 저었다.

▷고전에 나오는 ‘증자의 돼지’는 말의 책임, 약속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고사(古事)다. 증자보다 훨씬 통 큰 인물이 조선시대 중기에 살았다. 왕족이자 문신인 이경검은 자식에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 25칸 집 한 채를 아홉 살짜리 딸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을 담은 상속문서를 작성했다. 훗날 자식들 사이에 재산 다툼이 생길까봐 문서에 ‘다른 자식들은 불평하지 말라’는 조항과 맏아들의 서명까지 챙겨 두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번역 공개한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1596년)에 담긴 내용이다.

▷완고한 유교 사회에서 아들 제쳐놓고 어린 딸에게 집을 물려준 사연은 이렇다. 이경검은 ‘딸 바보의 원조’였던 듯하다. 임진왜란 와중에 망가진 집을 수리하는 것을 감독하러 가면서 금지옥엽 외동딸을 업고 다녔다. 그때 무심코 “다 고치면 이 집을 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딸은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단순한 말실수라고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선비로서 자기 말에 책임지는 길을 택했다.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조상과 달리 21세기 한국인들은 책임지지 못할 말이나 약속을 쉽게 남발한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 불신과 냉소의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이유다. 유병언 죽음과 관련해 국내 최고의 감식 기관이 과학적 조사를 거쳐 발표한 내용을 부정하면서 ‘가짜 시신’이라는 무책임한 의혹을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이 상식에 어긋난 말을 일삼는 걸 보면 볼테르의 말이 떠오른다. “상식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