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 나오는 ‘증자의 돼지’는 말의 책임, 약속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고사(古事)다. 증자보다 훨씬 통 큰 인물이 조선시대 중기에 살았다. 왕족이자 문신인 이경검은 자식에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 25칸 집 한 채를 아홉 살짜리 딸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을 담은 상속문서를 작성했다. 훗날 자식들 사이에 재산 다툼이 생길까봐 문서에 ‘다른 자식들은 불평하지 말라’는 조항과 맏아들의 서명까지 챙겨 두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번역 공개한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1596년)에 담긴 내용이다.
▷완고한 유교 사회에서 아들 제쳐놓고 어린 딸에게 집을 물려준 사연은 이렇다. 이경검은 ‘딸 바보의 원조’였던 듯하다. 임진왜란 와중에 망가진 집을 수리하는 것을 감독하러 가면서 금지옥엽 외동딸을 업고 다녔다. 그때 무심코 “다 고치면 이 집을 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딸은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단순한 말실수라고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선비로서 자기 말에 책임지는 길을 택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