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천도교인이 지난달 30일 개성에서 실무회담을 갖고, 9월 18일을 즈음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남북공동사업을 북측 지역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입니다. 10월 11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기념식 및 문화제에도 북측 천도교인과 동학(東學)농민군 후손을 초청하기로 했답니다.
지인에 따르면 두 날짜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9월 18일(1894년)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전국 동학 조직에 봉기를 의미하는, 총 기포령(起包令)을 내린 날입니다. 이날을 양력으로 바꾸면 10월 11일이 됩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학이란 단어는 서학으로 불린 가톨릭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연결됩니다. 현재 천도교 신자는 1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됩니다. 반면 가톨릭은 500만 명이 넘는 신자로 국내 3대 종단의 하나가 됐습니다.
일제강점기까지 천도교는 최대 종단이었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확인이 어렵지만 “1926년 동아일보가 당시 인구 2000만 중 200만 명이 천도교인으로 최대 종교였다고 보도했다”는 게 천도교의 설명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이 펴낸 ‘조계종사 근현대편’은 1929년 불교와 개신교 신자 수를 각각 16만9000여 명과 30만60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급격한 쇠퇴는 종교사에서도 드문 사례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종교학자들은 동학과 천도교로 이어지는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가장 큰 이유로 꼽습니다. 광복 이후 개신교가 근대화의 상징이 된 반면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천도교 내부의 문제도 지적됩니다. 종단 최고지도자인 교령 최덕신이 1976년, 오익제가 1997년 월북해 격랑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동학이 세상에 나온 지 150여 년, 세상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습니다. 천도교는 과거 그 어느 종교보다도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남과 북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천도교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