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 날 닮은 넌”
동일한 입면디자인 패턴과 재료. 외장공사업체도 똑같다. 두 건물은 어떤 관계일까. 한쪽은 “저작권 침해”를, 다른 한쪽은 “베낀 게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운생동건축 제공
두 사진을 보자.
부정형인 듯 일정한 패턴을 가진, 퐁당퐁당 돌 맞은 물결무늬. 물결을 층층이 쌓은 입체에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입혀 정중동(靜中動)의 입면을 만들었다. 2008년 완공 후 “건축이냐 조각이냐” 논란을 일으킨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의 복합문화시설 ‘크링(푸르지오밸리)’이다.
두 사진을 다시 자세히 보자.
“오랜만이야. 요즘 정말 잘나가네. 제주도에 ‘작은 크링’도 짓고.”
‘이 친구 갑자기 전화해서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어리둥절해하던 장 대표는 휴대전화로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고 기가 막혔다. 곧바로 면세점 건축주를 수소문해 ‘저작권 침해 중지’ 경고장을 보냈다. 한 주 만에 도착한 회신 내용은 황당했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건축외장업체의 홈페이지 샘플 이미지를 보고 ‘그런 느낌의 디자인을 원한다’고 요청해 계약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미 건물과 땅을 다른 회사에 팔았으니 이런 경고장 받을 이유가 없다.”
외장업체 홈페이지는 메인화면 하단에 크링의 입면 사진을 올려놓았다. 건축주는 이것을 ‘샘플 이미지’라고 한 것이다. 유명 건축가의 대표작을 아무 거리낌 없이 도배지 샘플처럼 쓰는 나라. ‘표절공화국’ ‘표절천국’이라는 자책은 공허하고 식상한 빈말이 된 지 오래인 나라. ‘창의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마저 뒤틀려버린 이 땅의 오늘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례다.
▼ 응모작 베낀 경주타워, 작가이름은 눈 안띄는 돌바닥에 ▼
우승상금에 이자 붙여 보상 ‘끝’… 관련법 강화는 되레 업계가 막아
①경북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한복판의 상징 건축물 경주타워.②설계공모 ‘낙선작’인 이타미 준 씨의 경주타워 계획안. 당선작은 가로로 널찍한 형상에 공연장을 갖춘 문화센터 건물이었다. 동아일보DB③2012년 공개한 ‘구치 프리미에르’ 향수 TV 광고.④올해 5월 선보인 맥주 ‘클라우드’ TV 광고. 광고 제작사는 “구치 광고 영상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튜브 캡처
누가 봐도 ‘베꼈다’는 의혹을 가질 만한 사안이지만 승소를 장담하기 어렵다. 힘들게 이긴다 한들 실질적 보상은 요원하다. 판결도 보상도, 뚜렷한 기준이 없는 탓이다.
다시 위 1, 2번 사진을 보자.
왼쪽은 경북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2007년 세워진 상징건축물 ‘경주타워’다. 높이 82m 직육면체 유리벽 건물에 황룡사 9층 목탑의 실루엣을 종이 인형 오리듯 뚫어냈다. 오른쪽은 재일동포 2세 건축가 이타미 준 씨가 2004년 경주타워 설계공모에 낸 계획안 투시도다.
“건축주인 문화엑스포 재단법인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형사 고소했지만 두 차례 기각됐습니다. 재정신청마저 무산되고 나서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민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했죠.”
건축가 고(故) 이타미 준 씨. 동아일보DB
보상액은 공모전 우승상금에 이자를 붙인 5000만 원. 도쿄에서 태어나 평생 거기 살면서도 한국 국적과 유동룡이라는 한국 이름을 간직한 이타미 씨는 고국에 제안한 말년 작품에 대한 상처를 품은 채 대법원 판결 한 달 전인 2011년 6월 74세로 숨을 거뒀다.
유 대표는 다시 소송을 내 설계자를 밝힌 청동명판을 경주타워에 붙여 달라고 요구했다. ‘저작권자(설계자) 유동룡’이라는 표기는 건물이 아닌 근처 바닥 돌에 새겨졌다. 완공 5년 뒤에야 건물 설계자로 겨우 인정받은 셈이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경주타워의 원고 승소 판결은 사실 흔치 않은 사례다. 피고가 패소한 것은 자백과 다름없는 자료를 실수로 내버린 탓이다. 그 회의록이 없었다면 원고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흔히 ‘건축디자인’이라고 하지만 건축물은 특허청의 디자인 산업재산권 등록 대상이 아니다. 미국 유럽과 달리 아무리 독특하고 혁신적인 형태와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라도 ‘디자인 창작물’로 인정되지 않는다. 3만 원을 내고 저작권 등록을 할 수 있지만 표절에 대한 저작권의 저항력은 산업재산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4년 전 ‘건축설계도 산업재산권 등록 대상으로 삼자’는 디자인보호법 개정 움직임이 있었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의 디자인 분류 국제기준을 따르려 한 것이지만 건축계 내부의 반대에 부닥쳐 무산됐다. 반대의 요지는 “설계 관련 권리를 둘러싼 분쟁이 빈발하면 창작활동이 위축된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50대 건축가는 “그들이 말하는 ‘창작’이란 바쁘다는 핑계로 ‘벤치마킹’이라는 식의 명목을 내세워 기존 설계를 이것저것 베껴 짜깁기하는 오랜 관행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디자인보호법 개정안 폐기로 인해 산업재산권 등록 기회를 잃은 건 건축만이 아니다. 한국의 디자인 재산권 등록 분류에는 ‘캐릭터 그림’이 빠져 있다. 노란 헬멧에 주황색 안경을 쓴 펭귄 ‘뽀로로’는 그림 자체만으로 디자인 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인형, 스케치북, 티셔츠 같은 실물에 찍혀야 재산권 신청이 가능하다. 산업재산권 없이 빈약한 ‘저작권 보호막’만 두른 뽀로로 그림이 짝퉁 상품에 마구 찍혀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 배우 전지현을 모델로 쓴 맥주회사 TV 광고가 해외 명품 브랜드 광고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모델이 입은 황금색 드레스 디자인, 배경음악의 분위기, 파티장 야경이라는 상황 설정, 그래픽 효과, 편집 방식 등이 판박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하지만 맥주광고 제작사는 “순수 창작물”이라고 주장했다.
특허청 디자인심사정책과 김지훈 사무관은 “설령 명품 브랜드 광고를 만든 업체가 소송을 걸어도 승산이 없을 거다. 저작권법의 중요한 국제 기준인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은 ‘표현’을 보호할 뿐 ‘아이디어’를 보호하지 않는다. 분위기, 스타일, 스토리텔링이 아무리 흡사해도 명품 향수 광고가 아닌 맥주 광고이므로, 모델이 금발 백인이 아닌 검은 머리의 한국인이므로, 아이디어의 차용이라 볼 수는 있겠지만 표현의 도용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는 설명이다.
경주타워 소송에서 피고의 ‘자백 자료’가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다면 원고가 저작권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원고 측 변론을 맡았던 신철민 변호사는 “1심은 계획안과 실제 건물의 탑 실루엣 형태나 세부 구조가 조금씩 다른 점에 주목해 ‘아이디어를 가져왔지만 표현이 다르다’고 봤을 것”이라고 했다.
저작권의 이런 특성은 뭐든 갖다 베껴 살짝 고쳐 내놓는 관행에 익숙한 생산자의 든든한 ‘믿을 구석’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경우 비주얼과 기능(아이디어)이 거울에 비춘 듯 똑같아도 소스코드(표현)가 다르면 별도 저작물로 본다. 게임 프로그램 표절 논란이 우후죽순 쏟아지는 이유다.
베껴 만드는 쪽은 “모든 프로그램 소스 코드를 공개 레퍼런스(reference·참고자료)로 삼아야 생산이 활성화되고 특정 업체의 독점이 줄어든다” “기존의 것을 참고하고 응용하는 데서 새로운 창작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국내 현실에서 저작권 관련 분쟁의 향방은 이 분야에 대한 판사와 변호사의 이해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정 판결이 어떻든 표절인지 아닌지는 결국 만든 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언제부터였을까. 논란에 휘말렸던 맥주 광고는 의심받은 요소를 일부 없앤 새 편집본을 방영하고 있다.
▼ “외국곡 6, 7개 들고와 작곡 의뢰… 이쯤되면 조립 수준” ▼
지난해 빌보드를 휩쓴 로빈 시크의 ‘블러드 라인스’ 뮤직 비디오(위 사진)와 효민이 6월 발표한 ‘나이스 바디’ 티저 영상. 동아일보DB
“드럼 패턴 1곡, 인트로 1곡, 브리지(연결부) 1곡, 후렴 1곡, 디-브리지(후반부 브리지) 1곡…. 가요 제작자가 서로 다른 외국 곡 6, 7개를 가져와 작곡을 의뢰하기도 해요. 이쯤 되면 조립 수준이죠.”
익명을 요구한 유명 작곡가 A 씨는 “원곡 느낌을 그대로 살리지 않으면 제작자가 오케이 사인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주문한 대로 여러 레퍼런스를 끼워 맞춰 어떻게든 자기만의 느낌과 기법을 살려보려 해도 누차 퇴짜를 맞으면 도리가 없다. 결국 그는 주문대로 작곡 편곡을 끝낸 뒤 “내 이름을 빼 달라”고 요구했다.
레퍼런스는 요즘 가요 작곡가 사이의 불문율이다. 대개 잘 만든 외국 곡을 지칭한다. 그걸 밑그림에 깔고 ‘비슷하되 약간 다른’ 곡을 만드는 게 히트곡의 당연한 작곡법으로 굳어졌다. 몇 년 새 표절 논란에 휘말린 작곡가 대부분이 “문제가 된 외국 곡은 그저 레퍼런스였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가요차트 30위권 노래 90% 이상이 특정 레퍼런스를 재료로 만든 곡이라 단언한다. 레퍼런스에서 자유로운 히트곡은 한 곡도 없다는 진단이다.
베끼기를 합리화하는 레퍼런스 관행은 작곡가 A 씨가 털어놓은 ‘히트곡 주문생산’ 체제의 산물이다.
가요 기획사들은 소속 가수의 새 앨범을 낼 때 제작자(대개 회사 대표)가 직접 또는 A&R(artist and repertory·가수에 어울리는 곡을 찾는 업무) 부서를 통해 콘셉트를 정한다. 이때 레퍼런스가 정해진다. ‘이기 아잘레아 스타일’ ‘로빈 시크풍’처럼 특정 팝 가수를 지목하거나 여러 가수의 스타일을 뒤섞는다. “베이스 반복음은 저스틴 팀버레이크 스타일, 드럼은 카니에 웨스트풍, 랩은 니키 미나즈 느낌” 하는 식이다.
다음은 실력이 검증된 유명 작곡가에게 레퍼런스를 제시하고 곡을 의뢰한다. 이 과정에서 10팀 안팎의 인기 작곡가에게 수백 곡이 몰린다. 한 해에도 수십 개의 아이돌그룹이 생성 소멸하는 가요계에서 소수 작곡가에게 과부하가 걸리기 마련이다.
히트 작곡가 B 씨는 “일감이 몰릴 때는 한 주 동안 서로 다른 장르 세 곡을 작곡 편곡했다. 짧은 기간에 맞춰 레퍼런스를 반복해 듣다 보면 무의식중에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간다”고 했다.
뮤직비디오, 의상, 안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 곡인 로빈 시크의 ‘블러드 라인스’는 가인과 효민의 뮤직비디오 레퍼런스가 됐다. 해당 가수 측은 “오마주(경의)”라고 해명했다.
레퍼런스는 싱어송라이터의 정규앨범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린 2000년대 중반부터 횡행하기 시작했다. 두세 곡 들어가는 디지털 앨범에 1억 원 가까이 투자해 주기 빠른 가요계에서 승부를 봐야 하니 제작자는 더욱 히트가 검증된 레퍼런스에 집착하게 된다.
강태규 대중음악평론가는 “가요 앨범에 창작자의 음악적 취향을 담는 건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 돼 버렸다”며 “트렌디한 곡이야 끊임없이 나오겠지만 세월의 파고를 견뎌내며 두고두고 사랑받을 독창적인 새 노래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2013년 표절 논란을 일으킨 ‘아이 갓 시’를 부른 개코, 박명수, 프라이머리(왼쪽부터). 동아일보DB
레퍼런스, 오마주, 벤치마킹, 모티브, 샘플링…. 이 실장의 말처럼 표절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여러 용어가 언제부턴지 어물쩍 ‘표절 창작’의 다양한 기법처럼 통용되고 있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베끼기의 창조화’는 이미 최소한의 죄의식마저 잃었다. 박효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도덕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건 이제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자극제가 절실하다. 디자인 산업재산권 적용 범위가 불합리하다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당연히 바꿔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뭔가 만들어내는 직업’을 가진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합당한지 돌아보는 거다.”
대부분의 국내 건축 또는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선작의 저작권은 공모 주체가 상금과 맞바꿔 ‘꿀꺽’ 한다.
광고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광고업 종사자는 언제 어디서나 대개 ‘슈퍼 을’이다. 가요계에서 히트곡으로 돈을 버는 건 자기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라 레퍼런스 짜깁기의 귀재들이다.
표절공화국. 맞는 말이기에 식상하게 들리는 거다. 호흡기를 단 지 오래인 이 땅의 ‘창의성’에 회생 가능성이 있을까. 절망적이지만, 치료법은 있다. 알면서 바꾸지 않아 계속 더 절망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손택균 sohn@donga.com·임희윤 기자
김민재 인턴기자 연세대 행정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