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판도 뒤바꾼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 전문가와 함께 고증해보니
6일 기준으로 관객 700만 명을 넘은 영화 ‘명량’. 백병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치지만(장면①), 실제 명량대첩에서 백병전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왜적이 달라붙어 육탄전이 벌어진 건(장면②) 안위 장군의 배뿐이었다. 울돌목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왜선(장면③) 역시 330척이 아닌 133척으로 전해진다. CJ E&M 제공
정유재란의 판도를 뒤바꿔놓았던 명량대첩은 어떤 전투였을까. 조선 선조 30년(1597년) 음력 9월 16일 울돌목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을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과 윤인수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얻어 짚어봤다. 두 학자 모두 개봉 직후 영화를 관람했다.
○ 거북선과 장검은 영화적 상상력
하지만 몇몇 짚을 대목이 없진 않다. 두 사람 모두 전쟁 직전 손실된 ‘거북선’을 첫손에 꼽았다. 명량에서 거북선은 건조되질 않았다. 앞서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인 칠천량해전 뒤 남은 게 없었다. 다만 충무공의 조카 이분(1566∼1619)이 쓴 행록(行錄)에 “장군이 전선을 구선(龜船)처럼 꾸며 군세를 도우라 명했다”고 나온다. 거북선을 무서워한 왜적을 기만하는 전술이었다.
장군이 친히 ‘장검’(보물 제326호)으로 적을 베던 모습도 사실과 다르다. 올해 제작 7주갑(周甲·420주년)을 맞는 장검 두 자루는 길이가 약 2m.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은 “칼날에 격검흔(擊劍痕·검이 부딪친 흔적)이 없는 의장용”이라고 설명했다. 공은 길이가 90∼100cm인 쌍룡검(雙龍劒)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백병전은 대장선에선 벌어지질 않았다. 거제현령으로 선봉에 섰던 안위(安衛·이승준 연기) 장군 배만 “왜적들이 의부(蟻附·개미떼처럼 달라붙음)해” 몸싸움이 벌어졌다.
○ 충무공의 수준 높은 심리전 돋보여
방심한 왜군은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낯선 조류도 개의치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때 또 다른 심리전술을 가동하는데, 영화처럼 일자진(一字陣)을 펼친 뒤 그 후방에 고깃배 수백 척을 띄웠다. 2011년 노 소장이 발굴한 의병장 오익창(吳益昌·1557∼1635)의 ‘사호집(沙湖集)’엔 “적이 대규모 전선으로 오인하도록 위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류와 위장에 당황한 왜군은 좁은 길목 탓에 조선 수군과 엇비슷한 숫자만 앞에 섰다. 마주선 배는 거의 13 대 13인 셈. 이때 조선의 우월한 화포가 위력을 발휘했다. 무른 삼나무로 만든 왜군의 배는 포의 반동을 버틸 수 없어 대포를 실을 수 없었다. 조선 판옥선은 두껍고 단단한 소나무 재질이라 원거리 화포 장착에 걸맞았다. 이렇게 한 줄 한 줄 포격으로 때려 부수니 왜적은 수적 우위를 써먹지 못했다.
‘충파(沖破·배와 배를 부딪쳐 부숨)’도 이 같은 배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왜선은 안 그래도 무른 목재인 데다 해협을 건너기에 유리하도록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었다. 조선 판옥선은 평상시엔 세곡을 나르는 조운선(漕運船)으로 쓰던 평저선(平底船·바닥이 평평한 배)이었다. 단단한 데다 넓적하니 충돌에 강했다. 다만 명량 때 충파 전술을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료는 이 해전에서 적선 31척이 침몰했다고 전한다. 영화처럼 330척이 전투에 나섰다면 겨우 10%를 잃고 퇴각하는 게 어색하다. 전남 해남군에 있는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에도 330척으로 나오나, 학계에선 운용할 수 있던 총량일 뿐 실제 전투엔 133척이 참전했다고 본다. 그래도 100척 넘게 남았는데 꽁무니를 뺀 건 역시 ‘이순신’이란 이름 석자가 지닌 힘이었다. 충무공은 적들의 이런 심리까지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