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승무원-콜센터직원 등 지정… 스트레스로 병 생기면 산재 인정
비슷한 경험이 몇 차례 반복되자 A 씨는 남성 고객만 오면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거리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불안증세를 겪기 시작했다. 함께 근무하는 팀장에게 불편함을 호소했지만 “우리도 다 똑같다”며 참으라는 말만 돌아왔다. 불쾌함을 참아가며 언제나 미소만 지어야 하는 근무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진 A 씨는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A 씨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감정노동자(emotional labor)’라고 부른다. 안전보건공단은 감정노동자가 국내 임금근로자 약 1770만 명 중 560만∼74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로 꼽히는 항공기 승무원, 매장 판매원, 콜센터 근로자를 비롯해 넓게는 사회복지 관련 직종이나 간호사 등 의료직 근로자도 감정노동자에 포함될 수 있다.
새누리당이 법률적 사각지대에 놓인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노동자법’을 7일 마련했다. 새누리당 윤재옥 의원(초선·대구 달서을)이 이날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등 3개 법률 개정안은 법적으로 감정노동자를 명확하게 규정해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매장판매원-간호사 등 감정노동자 스트레스 줄일 환경 업주가 조성해야 ▼
지난해 4월 한 대기업 임원이 “라면을 짜게 끓였다”는 이유로 항공기 여성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이후 감정노동자 문제는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회에서 감정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법률은 발의됐지만, 근본적으로 감정노동자를 규정할 수 있는 법률이 없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현재 근로기준법에는 ‘근로’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만 정의하고 있다. 윤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정신노동에 ‘업무수행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자신이 실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특정 감정을 표현하도록 업무상 요구되는 노동인 감정노동을 포함한다’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감정노동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성 평가 및 개선’ 항목을 신설해 감정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을 강화했다. 사업주에게도 감정노동으로 발생할 수 있는 건강 장애를 예방하도록 규정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사업주는 감정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작업환경을 조성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앞서 A 씨가 스트레스에 시달려 질병을 얻게 됐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윤 의원은 “소비자의 권리만 강조하면서 감정노동자의 권익에는 무관심했던 법률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일회성 관심으로 그치지 않고 제도적으로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악성 소비자(블랙컨슈머)를 제재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서울시 다산콜센터는 전화로 폭언과 성희롱을 일삼은 악성 민원인을 고소해 벌금 400만 원이 선고되기도 했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