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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교황 14∼18일 방한… 세계는 왜 프란치스코에 열광하는가

입력 | 2014-08-09 03:00:00

리무진 대신 십자가




군중 사이에서 보듬은 아이에게 미소를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세계는 프란치스코의 마법에 빠져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만나는 그의 눈높이 화법은 거부하기 어려운 또 다른 매력이다. 더난출판 제공

3월 13일 콘클라베(추기경단 선거회의·라틴어로 ‘열쇠로 잠근다’는 뜻)가 열리고 있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 15만 명의 시선은 작은 모자처럼 생긴 연통을 향하고 있었다.

전날 오후 추기경 115명이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시작됐다. 투표를 위한 토론은 관례에 따라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24시간 동안 성당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두 번 피어올랐다.

새로운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가 쉽게 피어오를 것으로 예측하는 이는 드물었다. 기다림은 당연한 것이다. 콘클라베는 며칠 또는 수개월,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오후 7시를 조금 넘기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흰 연기였다. 연통 주위를 맴돌아 좋은 징조라는 해석을 낳았던 갈매기도 사라졌다. 환호성과 종소리, 스위스 근위대 행진,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합창이 이어졌다.

마침내 베드로 성당의 발코니에 환한 조명이 비쳤다. 중앙에 나타난 장루이 토랑 추기경은 라틴어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교황이 나셨다)”이라고 외쳤다. 이어 “지극히 탁월하고 공경받으실 분의 이름은 호르헤 마리오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성(姓)은 “베르고글리오”라는 말이 이어졌다.

군중 사이에서 엄청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호르헤 마리오, 이 이름은 확실히 교황 후보로 거론되던 안젤로나 오질루가 아니었다. 마이크를 쥔 카메라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토 16세의 자진 사임 이후 한 달 이틀 만에 새 교황이 선출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그들 역시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 “빌어먹을, 도대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가 누구야?”

로마만큼은 아니지만 서울도 발칵 뒤집혔다. “뭐야, 밀라노 대교구장 안젤로 스콜라나 상파울루 추기경 오질루 셰레르가 아니네. 가나의 턱슨이나 나이지리아의 아린제도 ‘꽝’이고. 그런데 베르골리오, 베르골료, 베르고글리오, 어느 게 맞아?”

그로부터 515일. 베르고글리오, 이제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그를 모르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물론이고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이른바 ‘프란치스코 스타일’의 원천은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씨익 웃기만 해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그 미소와 삶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14일 방한을 앞두고 5가지 키워드로 그의 삶을 짚어본다.   



▼ 고급차 버리고 빈민가로… 스스로 고난을 선택한 교황 ▼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서, 伊이민자 5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이웃집 동갑내기 다몬테에게… “나와 결혼 않으면 神父가 될거야”
대교구장 됐지만 전용차 대신 전철… “거리로 나가 예수 전하라” 강론



성인 프란치스코와 교황 프란치스코

집무실 창문 앞에 서서 첫 삼종기도를 드리는 프란치스코 교황. 더난출판 제공

흰색 수단(발목까지 내려오는 성직자들의 옷)으로 가려진 ‘프란치스코의 성(城)’을 여는 첫 번째 열쇠는 프란치스코. 그날 토랑 추기경은 새 교황 선출 소식을 알린 뒤 “이분이 자신의 교황명을 선택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라고도 했다.

역대 교황들은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1182∼1226)를 교황명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피했다. 4세기 이전 인물들을 찾아 작명하는 것이 관례였고, ‘빈자의 성인’ ‘제2의 예수’로 불리는 프란치스코는 교황들에게도 버거운 이름이었다. 베르고글리오가 예수회 출신의 첫 교황임에도 ‘경쟁’ 수도회의 설립자 이름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개혁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쇄신의 단초를 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 형제들을 동지로 얻었고, 숱한 추종자들을 협력자로 얻었다. ‘제2의 예수’라 불렸을 만큼, 성 프란치스코가 일으킨 운동의 여운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증폭되어 갔다. 신임 교황이 이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앞으로 수세기를 지속할 새로운 개혁을 출범하겠다는 엄중한 사명을 선출 소감 일성으로 천명한 셈이다.”(차동엽 신부)

베르고글리오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티켓을 끊고 개혁의 버스에 오른 것이다. 그의 교황명은 이 버스의 최종 목적지이자 교황청 안팎을 향한 공공연한 선언이다.



두 개의 심장,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 개의 국적을 갖고 있다. 모국인 아르헨티나와 아버지의 출신국인 이탈리아,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부여받은 바티칸이다. 이탈리아 법률은 이민자의 자녀들에게도 국적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인 아버지 마리오 주세페 베르고글리오와 역시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인 어머니 레지나 마리아 시보리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이민을 결심한 것은 가난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재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는 회계원으로 일했지만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다섯째를 출산한 뒤 하반신 불구가 됐다.

어린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는 학교가 끝나면 준비된 재료로 다른 형제들과 요리를 했다. 13세 때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수업이 끝나면 세탁공장과 대학병원 실험실에서 일했다. 이 무렵 이웃집 딸인 동갑내기 아말리아 다몬테는 같은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베르고글리오의 여자 친구였다. 이 시기를 빼면 60여 년간 베르고글리오를 보지 못했다는 다몬테는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베르고글리오가 “만약 네가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신부(神父)가 될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회상했다.

나중에 추기경이 된 베르고글리오는 예수회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쿨’하게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로맨스’를 시인했다. “예, 맞습니다. 제가 함께 춤을 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 후에 신부가 되는 것이 저의 소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르고글리오가(家)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이었다. 가족들은 스페인어뿐 아니라 이탈리아어, 아버지 고향인 북부 피에몬테 방언까지 구사했다. 베르고글리오도 여자 친구와 이탈리아어로 대화했다. 청소년기 베르고글리오의 가슴에는 다른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라는 또 하나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추기경 품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을 때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와 함께 아버지가 살았던 옛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교황 선출 당시 외신과 교계 분석에 따르면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이탈리아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콘클라베에서 크게 우호적으로 작용했다. 28명의 이탈리아 추기경은 이전만은 못하지만 콘클라베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이다. 그들에게 신대륙 출신의 교황은 낯설고 두렵다. 하지만 자국 출신의 교황이 어렵다면 차선책이 필요했다. 베르고글리오와는 이탈리아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껍질을 벗고 거리로 나가라”

“우리는 거리로 나가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일이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껍질을 벗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고 말해야 합니다.”(2000년 3월 강론)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시절의 강론이다. 그는 ‘거리로 나가라’고 했다. 지난해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문 ‘복음의 기쁨’도 논란을 초래했다. 총 288항의 이 권고는 자본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교회의 변화와 공동선을 강조했다. 교황은 역대 어느 교황보다도 분명하게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모두가 복음의 기쁨을 누리자고 권고한다.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그가 땅을 딛고 걸어온 그 거리다. ‘거리로 나가라’는 것이 가톨릭 교계 일부에서 아전인수로 주장하는 것처럼 거리 투쟁과 정권 퇴진 주장은 아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지구 거의 반대편 바티칸에 거주하고 있는 78세의 교황은 스페인에서의 예수회 마지막 교육(1970∼1971년)과 1986년 독일 장크트게오르겐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체류한 1년여를 빼면 조국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가 걸어온 길, 거리를 이해하려면 불가피하게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1976년 쿠데타의 주모자인 총사령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후안 페론의 부인으로 대통령이던 이사벨 페론을 축출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7년간의 독재와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

당시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는 독재자에게 협력한 그룹과 저항을 위해 해방신학을 선택한 쪽으로 나뉘었다. 일각에서는 예수회 관구장이던 베르고글리오가 비델라 가족을 위해 미사를 올렸고, 잔인한 것으로 알려진 해군사령관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그가 독재자에게 협력했다고 비판했다.

민주화 이후 베르고글리오는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유대교 성직자와 인권운동가, 교회 관계자들이 그가 병이 난 신부를 대신해 비델라 가족을 위한 미사에 참여했고, 독재자에게 교도소에 있는 신부들을 풀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증언했다.

결정적인 증언자는 지금은 신부직을 내려놓고 프란치스코회를 떠난 브라질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두 보프였다. 그는 “많은 사람을 구해냈고 군부에 쫓겨 다니는 사람들을 숨겨 주었다”며 예수회 신부를 옹호했다.

더러운 전쟁 시기 베르고글리오는 가난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친구였다. 그렇지만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았다. 거리에 선 그가 손에 쥔 것은 총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이었으니까.

권위에 눌리지 않는 평범함

콘클라베 이후 기자들을 포함한 ‘교황 추적자’들이 놀란 것은 새 교황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메모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 그가 전철을 이용하고, 빈민가를 자주 드나들고, 작은 원룸에서 살고, 손수 요리하고, 축구클럽 산로렌소 알마그로의 열광적 팬이라는 내용만 기록했을 것이다. 이게 뭔가?  


▼ 강력한 견제 뚫고 ‘가톨릭 교회 개혁’ 거대한 첫걸음 ▼

아르헨 독재-인권유린에 맞서, 끝까지 ‘총’ 대신 ‘복음’을 손에…
교황의 낡고 싼 옷차림 보며… 고위 성직자들도 명품 버리기 시작
교황청 부패 척결과 교회 일치… 새 교황 프란치스코의 숙제로


2008년 부활절을 앞두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세족식에서 젊은 마약중독자의 발을 씻겨준 뒤 입을 맞추고 있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 더난출판 제공

다시 최근 출간된 ‘안녕하세요, 교황입니다’(더난출판)의 한 대목을 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민들은 검소하게 검은색의 수단을 입고 도시를 뛰어다니는 그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그가 성대한 환영을 받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 한동안 담배를 심하게 피웠고, 탱고를 사랑했으며, 프리드리히 횔덜린(독일의 시인)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소설가), 오스카상을 받은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과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했다.”

헷갈린다. 70대의 검소한 아르헨티나 노신사라면 평범하다는 게 맞다. 그러나 추기경이라는 타이틀을 보태면 평범한 것인가, 아닌가?

프란치스코의 성으로 들어가는 숨겨진 열쇠는 알 듯 모를 듯한 이 평범함 자체다. 아마도 프란치스코 자신, 그리고 그와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며 인사하는 소수를 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추기경의 삶에 대해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답변할 테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아르헨티나인은 평생 고수해 온 라이프스타일을 바티칸에 그대로 옮겨놨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황 관저 대신 여행자 숙소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 머물면서 다른 신부들과 저녁을 먹는다. 이름난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명품’ 수단과 구두, 십자가 대신 옛날 자신이 쓰던 것들을 그대로 쓴다. 전용 리무진 대신 걷거나 작은 차를 타고, 걸핏하면 사람들과 스킨십을 나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바티칸에는 파격이다. 아마도 수행원들과 교황청 각료들은 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도대체 왜 이전대로 하지 않는 거야. 경호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이제는 바티칸도 깨달았다. 베르고글리오, 이제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의 이 신부가 평생 쌓아온 성에 들어간 가장 중요한 건축 재료가 평범함이라는 것을. 고위 성직자들은 낡고 싼 옷차림의 교황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명품을 손으로 감추기 시작했다.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속적으로는 사제요, 주교요, 추기경이요, 교황일 수 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아닙니다.”(2013년 3월 14일 교황으로 봉헌한 첫 미사 강론)

그의 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다. 심지어 십자가를 제대로 지지 않는다면 교황일지언정 주님의 제자는 아니라는 선언이다. 베르고글리오는 오랫동안 삶에 밴 믿음을 실천했다. 교황이 됐다고 해서 바꿀 생각도 전혀 없다. 그의 세계에서는 세속의 교황보다 가난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가톨릭 교회의 ‘메시’

궁금증이 생길 수 있지만,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해하는 마지막 퍼즐이다. 베네딕토 16세로 상징되거나 그가 남긴 유산 때문이다. 그의 자진 사임은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거의 600년 만이었다. 당시 교황청에서 이 사임은 9·11테러급의 충격이었다. 지금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목받고 있지만 훗날 가톨릭사에서는 베네딕토 16세의 자진 사임이 더욱 굵은 글씨로 기록될 수도 있다.

2007년 콘클라베에서 베르고글리오는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의 지지를 받은 도전자로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6년 뒤 콘클라베는 처음에는 아르헨티나 추기경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이 새고 있는 ‘베드로호’에 승선한 늙은 추기경들의 그래도 쓸 만한 ‘한 수(手)’는 그를 새 선장으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베르고글리오의 교황으로서의 운명은 5가지 새로움으로 시작됐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교황, 신대륙에서 온 첫 교황, 예수회 출신의 첫 교황, 군중과의 첫 만남에서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첫 교황, 교황 직무를 시작할 때 전임 교황을 위해 기도를 제안한 첫 교황이다.

새로움은 축복이자 큰 무기다. 하지만 바티칸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제들에 파묻혀 있다. 교황청의 부패와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교회 일치, 여성 사제….

인생의 마지막 경기에 나선 노(老)선수는 강력한 수비를 뚫고 결승골을 넣을 수 있을까? 전차군단 독일에 맞선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를 보는 기분이다. 그래도 그의 팬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싶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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