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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관객 안 부러운 영화 ‘족구왕’과 ‘숫호구’…보셨나요?

입력 | 2014-08-12 11:32:00


영화 ‘족구왕’ 포스터 (왼쪽), 영화 ‘숫호구’ 한 장면.


"제대한지 5일 된 상고머리 복학생이 캠퍼스에서 족구를 한다." "나부대대한 숫총각 백수가 신체를 바꿔치기해 온갖 여성을 유혹한다."

이 무슨 '족구하는' 소린가 싶겠지만, 당당히 출사표를 던진 영화 2편의 스토리라인이다. 7일 소(少)개봉한 '숫호구'와 21일 뒤이을 '족구왕'은 겉만 보자면 생뚱맞고 지질한 C급영화다. A급은커녕 요즘 대세인 B급 마이너 영화에 끼기도 힘들다.

허나 성수기 대작의 장벽을 헤치고 몇 군데 상영하지도 않는 영화들을 찾은 관객이라면, 성배를 찾은 인디애나존스의 감흥을 만끽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각종 영화제에서 한국독립영화의 유쾌한 반란으로 입소문을 탔던 두 영화의 '쭈쭈바' 같은 청춘 백서를 들쳐보자.

● 서툴고 투박해도 진정성은 넘실댄다.



최근 '명량'이 한국영화 흥행사를 새로 쓰고 있듯, 숫호구도 범접하기 힘든 기록을 세운 작품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극장에 걸린 가장 제작비가 적게 든 장편영화'로.

"단돈 100만 원으로" 영화에 뛰어든 백승기 감독은 촬영 편집을 끝낸 뒤 통장에 30만 원을 남겼다. 일단 출연료가 제로였다. 주인공은 본인이 맡았고, 나머지 배역은 지인이거나 꼬드기거나. 영화 속 부모도 진짜 아버지 어머니가 나오셨다.

섭외비나 운영비도 안 들었다. 감독이 8살 때부터 산 인천의 동네 서점과 노래방 등이 "누구네 집 아들내미가 영화 찍는다"며 공짜로 장소를 내줬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힘내라며 밥값을 받지 않았다. 촬영장비는 DSLR 카메라로 버텼다.

이러다보니 때깔은 당연히 후지다. 연기도 어색하고, 편집은 조악하다. 내용은 더 구리다. 서른 살이 되도록 연애도 취직도 못해 본 주인공 원준은 안타까운 외모와 스펙 0%의 '숫총각+호구'. 성경험은커녕 여자들에게 맞고 다닌다. 그런데 웬 생명공학박사가 섹시매력 충만한 '아바타'를 개발했다며 실험대상으로 원준을 유혹한다.


숫호구는 개연성도 설득력도 떨어지지만 웃기고 슬프다. 뭘 해도 나아질 게 없는 청춘일지언정 진심과 사랑은 소중할 터.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해야 한다면 그건 올바른 선택일까. 특히 처연하기까지 한 영화의 끝자락은 울림이 크다. 감독의 호기로운 반문이 스크린을 꽉 채운다. "허술하면, 어색하면 왜 안 되지?"

●천만 영화 안 부러운 쌈빡한 웃음(그리고 눈물)



족구왕은 지난해 '1999, 면회'로 호평 받았던 독립영화사 광화문시네마의 두 번째 작품. 제작비는 약 1억원으로 숫호구에 비하면 블록버스터지만, 마케팅비용까지 200억 원 가까이 드는 요즘 대작들과 견주자면 '12 대 330척' 싸움 저리 가라다.

누리꾼 사이에서 한국판 '소림축구'로 불리는 영화는 여학생들이 딱 싫어하는 '족구하는 복학생'을 소재로 삼았다. 제대 직후 식품영양학과에 복학한 만섭(안재홍)은 학점 2.1에 토익은 본 적도 없다. 취직 준비는 안 하고 족구에 빠져 산다. 남들 혀 차는 소리만 듣던 그가 캠퍼스 퀸인 안나(황승언)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 옆엔 잘생긴 전직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있었으니….


족구왕은 잘 빠진 영화다. 스토리에 최적화된 캐릭터들이 돋보이고 흐름도 군더더기가 없다. 코미디 상업영화 공식을 지키면서도 통통 튀는 신선함이 살아있다. 특히 안재홍의 연기가 놀랍다. 진짜 군대 물이 덜 빠진 복학생을 마주한 기분이다. 여주인공 역시 연기가 욕설만큼 차지다.

하지만 이 코미디를 살리는 진짜 힘은 '암울한 젊음의 현실'이다. 전역한지 얼마나 됐다고 공무원시험 준비하라 구박당하고, 등록금 대출이자에 알바를 몇 탕씩 뛰는데도 독촉전화에 시달려야 하는. 그런데 연애는커녕 좋아하는 족구조차 맘대로 할 수 없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란 한마디는 서글픈 청춘의 지친 어깨를 감싸는 위로다.

제작진은 "평소 독립영화는 1만 명이 목표지만, 이번엔 10만 명 관람을 노려보겠다"며 호기로운 공약을 내걸었다. 천만 영화의 승승장구도 반갑지만, 갖은 독립영화들이 수십만 명씩 들 날은 언제일지. 두 영화,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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