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책 읽는 황금마차’ 할머니들
11일 어린이집에서 ‘이야기 할머니’ 김정순 씨(왼쪽)와 박귀조 씨가 직접 만든 천 가면을 들고 어린이들에게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을 들려주고 있다. 강남구 제공
1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하나어린이집. 김정순 씨(64)와 박귀조(64), 김영해 씨(62)가 노래를 부르며 들어서자 2∼3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몇은 ‘이야기 할머니’들을 알아본 듯 방긋 웃으며 율동을 금세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이 가방에서 손수 만든 혹부리 영감 가면을 꺼내 “옛날 옛적에∼”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 동네 ‘이야기 할머니’들은 2009년 강남구청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동화구연’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 모였다. 대부분 가정주부로 살아왔던 할머니들은 교육생 모집 공고를 보고 ‘배워서 손주들한테나 들려줘볼까’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시간이나 보내지 뭐’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첫 수업에서 동화구연 강사가 “할아버지나 아기, 엄마 목소리를 흉내내보라”고 할 때만 해도 ‘낯부끄러워서 저런 걸 어떻게 하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1년의 훈련 끝에 이젠 어엿한 ‘프로’ 동화구연가가 됐다. ‘혹부리 영감’ 같은 전래동화부터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다룬 동화 ‘엄마 왜 그래’까지 할머니들은 성우처럼 여러 개의 캐릭터를 순식간에 오간다.
동화구연을 시작한 뒤 할머니들의 인생에 새로운 낙이 생겼다. 박귀조 씨는 “대부분 집밖에 몰랐던 가정주부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만나 동화구연을 하며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며 “지역 사회에도 보탬이 될 수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김정순 씨는 “동화구연을 하고 나서 딱딱했던 표정이 바뀌어 지금은 자식들까지 응원해준다”고 덧붙였다. 이 동아리는 처음엔 2, 3명의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규모가 커져 회원 11명을 거느리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들과 더불어 치매노인들이 모인 곳도 찾아다니며 동화구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동아리 회장 김영해 씨는 “오늘도 동화구연을 배우고 싶다며 할머니 2명이 더 찾아왔다”면서 “앞으로 이야기 할머니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