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세당 ‘서계유묵’ 수록 편지 번역 공개
《 “집안에 마소 세 마리를 먹일 한 단의 건초도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이네. 자네 집에 여분의 건초가 있을 듯해서 노복을 보내네. 얻을 수 있겠는가?” (1696년 3월 16일)
“긴요하게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 참마 한두 단을 보내줄 수 없겠는가? 숯 서너 말도 얻었으면 하네.” (1698년 3월 23일) 》
박세당이 제자 이정신에게 써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나이 마흔에 힘겨운 벼슬살이를 시작하는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반남 박씨 종가에 전하는 서계 박세당의 영정. 17세기 조선시대 정치·사상계의 거두였던 그는 마흔 살에 낙향해 농업기술서인 ‘색경’과 ‘사변록’ 등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실제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피 끓는 부정(父情)으로 토해낸 글은 지금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죽은 아들을 지난 윤달 땅에 묻었는데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렵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살고 싶은 마음은 더 줄어드니 이를 어찌 하겠나”(1686년 6월 5일)
큰아들 태유가 1686년 봄 39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숨진 뒤 이정신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비통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로부터 3년 뒤 작은아들 태보마저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 유배를 떠나던 도중 목숨을 잃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학자로서 제자를 아끼는 마음도 남달랐다. 특히 불혹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이정신에게 낙향을 권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들려준 사연이 이채롭다. 청운의 뜻을 막 펼치려는 제자에게 왜 하필 스승은 귀거래사를 써 준 걸까.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돌아왔구나! 바라건대 세상과 사귐을 쉬고 벼슬길을 끊어버리리라.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났으니 다시금 멍에를 매어 무얼 구하겠는가).’
시를 쓴 도연명이 팽택 현령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나이가 마흔. 공교롭게도 박세당이 관직을 버리고 양주 석천동(현 경기 의정부시)에 은거했을 당시 나이도 마흔이다. 평소 도연명을 흠모하던 박세당이 일부러 40세에 맞춰 낙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 조정에서 치열한 당파싸움을 겪었던 박세당은 벼슬살이의 괴로움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김 실장은 “박세당은 제자인 이정신도 조정에서 수없이 부침을 겪을 것을 내다보고 언제든 버거운 짐을 내려놓을 것을 미리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