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함기선 한서대총장 ‘미스코리아 닥터’로 불리던 성형전문의 시절
함 박사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1983년 제27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동아일보DB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이 된 이후로 날 찾아오는 미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당시 명동에선 ‘함 박사님을 거쳐야 미스코리아가 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덩달아 나도 방송국에 자주 불려 다녔다. TV에 많을 땐 일주일에 3, 4번까지도 나갔다. 청취자상담 라디오프로에도 고정출연했다. 당시 명동엔 ‘미스코리아 사관학교’라고 불리던 마샬미용실이란 곳이 있었는데, 아예 그곳에선 미스코리아대회에 내보낼 후보들을 우리 병원에 보내 수술해야 할지 물어보도록 했다. 물론 일부에선 나를 ‘탤런트교수’라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함기선은 옛 책과 그림을 보며 한국미인들에 대해 파고들었다. 신윤복 김홍도의 풍속화가 많은 참고가 됐다.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그걸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었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인의 기준은 뭘까. 인체해부학적으로 구체적인 기준을 구할 수는 없을까. 1979년 그는 후배 여의사를 미스코리아 참가자들과 합숙시켜 그걸 밝혀내도록 했다. 얼굴 키 가슴 등 신체치수를 재고 그 특성을 분석해 논문을 쓰도록 했다. 그건 여의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성형외과는 수술을 아무리 잘해도 환자가 만족하지 않으면 끝이다. 환자만족이 1순위이고, 의사만족은 그 다음이다. 0순위도 있다. 환자의 배우자나 친구다. 환자가 만족하고 돌아갔지만, 그걸 본 배우자가 ‘×같다’고 하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다. 주위 친구들이 이러쿵저러쿵 도마 위에 올려 씹기 시작하면, 그 다음 날의 거친 항의는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쌍꺼풀수술이 가장 어렵고 흥미롭다. 그 자리에서 반창고만 풀면 잘됐나 못됐나 금방 판가름 난다. 백인들보다 한국인들 피부가 더 어렵다. 백인들은 흉터가 덜 남는 반면, 한국인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흉이 진다.
성형외과는 ‘칼을 쓰는 정신의학’이다. 의학책보다 심리학책이 훨씬 더 쓸모가 있다. 더구나 환자의 97% 이상이 여성이다. ‘소아과는 말이 안 통해서 문제지만, 성형외과는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이다. 의사가 아무리 잘됐다고 해도, 환자가 아니라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때도 있다. 의사가 보기에 수술이 필요 없는데도, 환자가 우겨서 해야만 할 때도 있다.
“요즘 성형미인들의 얼굴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개성이 없다. 턱이나 광대뼈 등 골격을 손댔기 때문이다. 사람 골격에 맞춰서 눈 코 입 등을 조화롭게 했어야 하는데…. 사실 성형외과병원이 너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하나같이 상업주의로만 치닫고 있다. 성형외과도 엄연한 의료다. 장사하듯이 하면 안 된다. 사람과 물건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1984년 어느 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요원들이 찾아와 어떤 남자의 얼굴을 완전히 딴사람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그 이유로 ‘국익과 본인의 생명보호’를 내세웠다. 나와 간호사들에게 ‘일정기간 수술비밀을 지킨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이한영 씨(1960∼1997)다. 그는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의 아들이다(김정일의 처조카). 그는 1982년 10월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극비 망명했다. 그는 넉 달 가까이 입원해서 5번 안면윤곽수술과 미용수술을 받았다. ‘숯돌 이마’를 돌출시키고, 턱을 길게 빼줬다. 코를 높이고, 눈을 크게 해줬고, 쌍꺼풀수술도 했다. 붕대를 풀자 본인 자신이 만족스러워했다. 그 이전보다 훨씬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의 친구들도 ‘목소리는 한영인데…’ 하면서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날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다. 1997년 그의 괴한 피습 사망소식을 듣고, 무척 마음이 아팠다. 사업이 뜻대로 잘 안 풀린다며 나를 찾아와 하소연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