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는 타인이나 국가가 개입할수 없는 주관적 감정 슬픔을 뭔가 할 수 있는 ‘힘’으로 삼는다면 어떨까요”
―이번 사고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죠.
“물론입니다. 저도 그날 사고 비행기가 떠난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에서 서울 가는 다른 비행기를 탔어요. 제 동생은 한 달 전에 바로 그 비행기를 타고 말레이시아에 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서울 도착 몇 시간 후 페이스북으로 사고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던 시간에 폭격을 당한 거죠. 그날 공항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 중에 희생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네덜란드 언론들은 ‘우리 모두 누군가의 친구이자 가족이 죽었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에요. 알다시피 네덜란드는 인구가 150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잖아요.”
“이번 사고가 터지기 2주 전만 해도 네덜란드는 축제 분위기였지요. 월드컵에서 3위를 했으니까요. 한마디로 ‘네덜란드 민족주의’에 완전 도취되어 있었죠. 그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고가 난 겁니다. 누구나 당혹감과 슬픔에 빠졌죠.”
―하지만 외신을 통해 듣는 분위기로 느껴지건대 네덜란드인들은 슬픔을 표현하는 데 매우 신중해보입니다. 추모 행사가 전역에서 일어난다거나 국가 행사로 진행되지도 않더군요. 유족들의 비통함이 TV 같은 것을 통해 전달되지도 않고요.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은 애도나 추모는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타인이나 혹은 정부가 개입하거나 간섭할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축구에 이겼다고 모든 사람이 기뻐해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대형 참사가 터졌다고 모두 슬퍼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사람의 감정은 매우 주관적이고 이를 표현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죠.”
―한국인들이 보기엔 좀 냉정해보입니다.
기자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눈으로 묻자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비극을 겪으면서 유럽은 자기 민족 우월주의에 빠진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 인류를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멸망의 길로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해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한국에도 아직 친일파 논쟁이 있지만 네덜란드에도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는 동안 묵인하거나 협조한 사람들을 향해 세대로 이어지는 친나치파 논쟁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만큼 상처가 컸다는 뜻이지요. 어떻든 전쟁이 끝난 후 나치 협력자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긴 했지만 그것이 과연 미래에 얼마나 긍정적인가 하는 여론도 높았습니다. 그러면서 각자 사는 길보다 함께 사는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민족주의’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사회적으로 금기가 되는 분위기를 만들었지요. 일례로 네덜란드 중고교생들이 배우는 교과목 중에는 한국식의 ‘국사(國史)’가 따로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잠깐 네덜란드 역사를 배울 뿐 중학교 때부터는 자국 역사도 전체 유럽 역사 속의 하나라는 앵글에서 배웁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터부가 슬픔을 표현하는 데 신중하게 만든다는 것으로 어떻게 연결되나요.
“이번에 193명의 네덜란드인들이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긴 했지만 과연 이것이 우리 민족만 당한 비극이냐 하는 물음과 성찰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지만 그 슬픔을 표현할 때에는 한발 물러서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과연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의 비극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해 하루에 100여 명씩 죽어나갔습니다. 시리아 리비아는 또 어떻습니까. 게다가 이번 사고로 네덜란드 사람만 죽은 것도 아닌데 마치 우리만 특별한 비극을 겪고 있는 것처럼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인가 하는 질문이 지식인들을 비롯한 사람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거듭 말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적 차이이지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판단의 영역이 아닙니다. 재난이나 불행 앞에서 놀라고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입니다. 더구나 가까이 있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느끼는 마음은 모두 다 같습니다. 다만 그런 일을 겪었을 때 내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혹여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없는지 하는 질문을 해본다는 거죠.”
그는 미국 9·11테러 이야기도 했다.
“9·11 때 세계인들이 그랬지만 네덜란드인들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들 시간을 정해 묵념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지식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란이나 파키스탄 등에서 지진이 나면 1만 명 이상이 죽는 경우가 있다, 그때 우리는 뭘 했나, 과연 지금처럼 이렇게 슬퍼했나, 미국과 네덜란드가 동맹국이기 때문에 (9·11 피해를) 더욱 크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말이죠.”
―이번 비행기를 격추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우크라이나 반군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는 없나요.
“물론 있지요. 하지만 집단행동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봐야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유족들 이야기가 언론에 많이 나옵니까.
“별로 없습니다.”
―그럼 네덜란드 언론들은 주로 무엇을 다루나요.
“러시아 제재에 관한 내용들이 주로 다뤄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와 네덜란드 경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간단치는 않아 보입니다.”
그는 유럽에서 알아주는 한국학 권위자다. 유럽 동양학의 본산이라 인정받고 있는 네덜란드 레이던대학에서 30여 년 동안 한국학을 가르치고 정년퇴임한 뒤 2010년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임용돼 서울 생활을 하고 있다. 그전에도 한국을 수차례 오갔다.
10여 권에 이르는 단행본과 80여 편에 달하는 논문을 통해 유럽에 한국학을 알리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그는 유럽한국학회 결성을 주도하고 학회장을 두 번이나 맡기도 했다. 본래 일본 문학을 전공했다가 한국 문학으로 바꾼 그의 박사학위 주제는 ‘한국의 무가(巫歌·무당의 노래)’. 홍길동전, 배비장전, 변강쇠전과 같은 고전을 네덜란드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한 그는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그 덕분에 인터뷰는 대부분 한국말로 진행됐다.
―무당들도 많이 만났겠네요.
“굿하는 현장도 100차례 넘게 가보았습니다. 굿을 보면 한국인들의 정서를 알 수 있죠. 아주 슬픈 순간도 있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도 있고 감정의 진폭이 매우 크고 빨리 변하죠. 복잡하기도 하고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한(恨)이라는 정서가 이해가 됩니까.
“흥미로운 주제죠. 한국 사람들은 어떤 면에선 감정을 잘 표현하지만, 어떤 대목에선 그렇지 못해요. 굿을 보면 알 수 있죠. 갑자기 죽은 40대 남자의 영혼을 부르는 굿을 본 적이 있어요. 무당 몸에 남편 혼령이 들어와 맏아들 앞에 가서 뭐라고 막 떠드니까 아내와 아들이 주저앉아 통곡을 하더군요. 나중에 유족들에게 들었더니 아버지가 생전에 가족한테 못했던 말을 들은 것 같다며 이제야 가슴속에 막힌 게 뻥 뚫린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그의 말을 들으며 세월호 참사 후 김지하 시인을 인터뷰했을 때 동석했던 그의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에게서 들었던 “지금 한국에는 유족들과 국민의 한을 풀어줄 씻김굿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더니 “매우 공감한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무당들을 나쁘게 보는 한국인도 많지만, 잘하는 무당들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웃음) 남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탁월해보였습니다.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굿의 치유 효과는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의식인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은 요즘 굉장히 우울합니다. 슬픔 허탈 자책 분노 실망 자포자기 심정이 뒤엉켜 있지요. 한국인들 정서의 밑바닥을 오래 연구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저 개인적으로도 놀라고 한국에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선장 선원들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고요. 어떻게 보면 선장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낮은 급여에 비정규직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희생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슬프지만, 산 사람들은 어떻든 계속 살아나가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슬픔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