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국제부 기자
사제 성범죄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바티칸은 늘 사제 개인의 일탈로 치부했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의 조직적 은폐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요즘 말로 적폐(積弊)다. 바티칸이 뒤집혔지만 파킨슨병을 앓던 말년의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후임 베네딕토 16세는 더했다. 그의 형 게오르크 라칭거 신부가 한때 이끌었던 소년성가대 내의 추행이 밝혀져 교황 개인의 권위까지 추락했다. 세계 곳곳에서 유사 사건이 드러났고 소송비와 합의금으로 파산하는 교구가 속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존립을 뒤흔든 이 문제에 응답한 유일한 교황이다. 올해 3월 아동성추행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7월 피해자를 만나 사과했다. 모두 역대 교황 최초다. 유엔이 교황청 대표를 조사하고 청문회를 여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바티칸 내부와 마피아 연루 의혹에도 칼을 댔다. 역대 교황 최초로 마피아를 파문했고 돈세탁, 횡령, 마피아 연계설에 휩싸인 바티칸은행 경영진을 싹 바꾸고 계좌 1600개도 폐쇄했다.
교황의 개혁이 성공할지 예단할 수 없다. 여러 교황이 나름의 쇄신을 시도했지만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신변 위협도 있다. 지난해 브라질을 방문한 그가 설교하려던 성당에서 폭탄이 발견됐다. 하지만 그는 “이 나이에 무엇이 두렵겠느냐”며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4박 5일간 세월호 참사 유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해고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를 어루만진 교황의 여운이 짙다. 그가 한국에서만 반짝 감동을 준 게 아니라 2000년 된 가톨릭 조직 곳곳의 병폐를 해소하는 가운데 전 세계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듬는 일까지 소홀하지 않았기에 울림이 더 크고 깊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누구나 혁신과 개혁을 외친다. 하지만 교황처럼 목숨과 지위를 걸고 나서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작은 차를 타고 허름한 숙소에 묵는다고 교황과 비슷해지는 게 아니다.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개혁에 수반되는 거센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교황을 바라보던 국민의 눈에 대한민국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허전하게 비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