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훼손 막으려 실내로 옮겨놨어요”
제자리를 떠나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세워져 있는 국보 86호 경천사터 10층 석탑. 오른쪽 사진은 2005년 보수공사를 마친 경천사탑의 조립 모습. 동아일보DB
이 탑은 그 외형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늘씬하게 솟아 올라간 몸매, 각 층마다 세련된 모양의 탑신(塔身·몸체)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 다양하고 화려한 조각 등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요.
그런데 경천사터 10층 석탑이 왜 박물관 건물 안에 있는 걸까요? 탑은 원래 야외에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찰의 마당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 일제의 불법 약탈과 유랑의 시작
그러나 한국과 일본 안팎에서 비난 여론에 직면했고 결국 1918년 이 탑을 한국에 돌려주었습니다. 경천사터 10층 석탑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어요. 그 주인공은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입니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지요. 그는 1907년 영자신문 ‘Korea Daily News’에 일제의 경천사탑 약탈 사실을 폭로하고 반환의 당위성을 역설했습니다. 헐버트는 당시 선교사이자 고종 황제의 외교 조언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미국인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1907년 고종에게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 특사 파견을 건의했다가 1909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1907년 일본의 영자신문 ‘Japan Mail’과 ‘Japan Chronicle’에 약탈 사실을 알려 반환 여론을 이끌어 냈지요.
베델과 헐버트의 노력에 힘입어 탑이 한국에 돌아왔지만 탑은 이미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반환 이후에도 별다른 보존 조치 없이 포장된 상태로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탑에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고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 탑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1959년. 그제야 보수에 들어간 것이지요. 1년간의 작업 끝에 1960년 탑을 복원해 경복궁 경내에 전시했어요. 하지만 탈락 부위를 시멘트로 메우는 정도에 그친 비과학적이고 부실한 보수, 복원이었습니다.
경천사터 10층 석탑은 복원 이후 경복궁 야외에 전시되면서 풍화작용과 산성비 등으로 인해 훼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더이상의 훼손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5년 해체 보수를 결정했습니다.
먼저 탑의 142개 부재를 모두 해체한 뒤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 각 부재의 보수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비바람으로 인해 약화된 대리석을 단단하게 경화(硬化) 처리하고, 균열 부위를 천연 접착제로 붙였습니다. 1960년 복원 때 채워 넣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레이저를 이용해 표면의 오염물도 닦아냈지요. 해체된 탑의 부재 142개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64개를 새로운 대리석으로 교체했습니다. 이 탑의 원래 대리석과 암질(巖質)이 유사한 강원도 정선 지역의 대리석을 사용했어요.
○ 건물 속으로 들어간 석탑
보수 보존 처리를 하는 사이, 문화재 전문가들은 경천사터 10층 석탑을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야외에 세울 경우, 훼손이 심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지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4월부터 조립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수평과 균형을 잡아가며 142개의 부재를 높이 13m까지 쌓아 올린다는 건 고난도의 작업이지요. 1㎜만 맞지 않아도 제대로 조립이 되지 않습니다. 이 탑의 조립에는 석탑의 해체 조립 경력 15년 안팎의 석공 3, 4명이 5개월 동안이나 매달려야 했지요.
문화재는 원칙적으로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화재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경천사터 10층 석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단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통일이 되어 이 탑이 개성의 고향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해 봅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