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돌려주세요 2부]① 이랜드월드 ‘강제소등제’ 실시 8개월
7월 10일 오후 6시 이랜드월드 전 사옥의 불이 꺼지자 직원들이 일손을 놓고 퇴근을 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다. 이 회사는 2014년 1월부터 ‘오후 6시 강제소등제’를 실시해 쓸데없는 야근을 줄이고 직원들의 일-가정 양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이랜드 계열사 중 패션사업을 담당하는 ‘이랜드월드’는 업무 특성상 야근이 많은 편이었다.
디자이너와 공장관리자의 야근은 필수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최근 중국 등 해외 진출이 확대되면서 마케팅 담당 부서까지 업무량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이랜드월드’는 ‘일랜드 월드’”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성원 중 누구도 이런 말을 안한다. 이랜드월드 전 사옥은 오후 6시가 되면 무조건 불을 끈다. “제발 야근 좀 그만하고 싶다”던 직원들의 입에선 “야근 한번 하려면 윗사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저녁을 돌려주겠다’는 최고경영자(CEO)의 방침에 따라 이랜드월드가 강제로 야근 줄이기에 나선 결과다. 》
○ “불 꺼!”
인사기획팀 김보혈 대리는 매일 오후 5시 40분이면 이랜드월드 전 사옥을 샅샅이 누빈다. 김 대리가 등장하면 사무실도 분주해진다. 오후 6시에는 모든 사무실이 불을 완전히 꺼야 하는 규정이 있고, 김 대리가 소등 여부를 일일이 체크하는 감독관이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는 오후 6시에는 무조건 불을 끈다는 강제규정을 만들었다. 야근을 필히 해야 하는 부서는 오후 4시 30분까지 야근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신청서를 내지 않고 하는 야근은 ‘불법’이다. 각 팀은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야근 쿠폰’ 한도 내에서만 야근을 해야 한다. 대략 한 사람이 한 달에 3일 정도 쓸 수 있다. 각 팀의 정시퇴근 여부는 부서장의 인사고과에도 반영된다. 야근 신청서를 내지 않고 몰래 야근을 하다가 적발된 건수가 많을수록 부서장의 평가 점수가 깎인다.
○ 오히려 업무 효율은 향상
‘정시 소등제’를 실시한 뒤 직원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잡화생산부에서 일하는 유미란 대리(29)는 올해 상반기부터 요가를 배우고 있다. 회사 근처 상가에 있는 요가센터에 가서 일주일에 세 번씩 몸을 풀고 오는 게 일상이 됐다. 주 3일 이상 야근을 했던 지난해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유 대리는 “처음엔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막상 강제소등에 맞춰 퇴근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야근을 굳이 안 해도 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조윤주 대리(34)는 아이들에게 저녁밥을 챙겨준 적이 거의 없다. ‘키즈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수요조사, 미팅으로 하루 일정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야근을 해야 눈치가 덜 보이기 때문에 미팅을 저녁시간으로 잡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강제소등제 시행 이후 조 대리는 미팅을 되도록 낮 시간에 잡으려고 노력한다. 외근할 때도 회사로 돌아와 야근 행렬에 동참하던 관행도 없애고 외근지에서 퇴근하는 습관을 들였다. 두 아이와의 시간은 자연스레 늘어났다. 조 대리는 “결혼 초부터 경력 단절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12개월도 채 안 된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긴 게 아쉬웠다”면서 “이젠 매 저녁을 아이들과 함께 하며 미안함을 씻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 남겨진 숙제는?
하지만 아직도 사내에선 강제소등제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디자인을 하거나, 시차가 큰 해외 지사와 일을 해야 하는 팀은 “업무 특성도 고려하지 않고 근무시간만 줄여놓으면 성과가 떨어진다”고 불만이다.
‘야근은 필수’라는 인식을 가진 직원도 상당수 남아 있다. 20년 차 직원 A 씨는 “총감독자인 나는 정시퇴근이 어렵다”면서 “‘내가 막내였을 땐 일하는 선배를 두고 먼저 가버리진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학준 이랜드월드 인사기획팀 과장은 “부서별 특성을 고려해 야근 쿠폰 발급을 늘리는 등 제도를 조정할 계획”이라며 “정기적인 업무재설계를 통해 소모적인 일처리 단계를 줄여 야근을 최소화하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