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실패 극복하고 세계 G2 이끈 공적에 중국인들 열광 실상과 동떨어진 정보로 한국 지식인사회 오도한 ‘사상의 은사’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다음 날 해안에는 홍콩 입국에 실패한 수백 구의 시신이 떠올랐다. 감옥은 붙잡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이 지역 책임자였던 시중쉰이 이들을 모두 석방하며 했다는 말은 절절하다. “이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정작 탓해야 할 사람은 이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 우리 정책지도자들이다.”
내일로 탄생 110주년을 맞는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이 사건이 발생한 광둥 성 선전에서 시작됐다. 광둥 성 서기였던 시중쉰이 이곳에 경제특구를 만들자고 건의하고 덩샤오핑이 받아들였다. 오늘날 선전은 인구 1400만 명에 빌딩 숲으로 가득 찬 대도시가 됐다. 중국에서 최초로 1인당 연간 소득 2만 달러를 넘었다.
중국중앙(CC)TV가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에는 덩샤오핑이 문화혁명에 대해 “내가 18세부터 생각해온 혁명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 따위가 무슨 혁명이냐”라고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사처럼 문화혁명에 대한 평가는 이미 끝난 상태다. 마오쩌둥은 중국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한다는 구실로 홍위병을 동원해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사회 질서는 엉망이 되고 경제는 붕괴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나서야 광풍은 멈췄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문화혁명을 겪고 난 뒤 뼈저린 반성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같은 시기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오히려 마오쩌둥 체제를 동경하는 움직임이 번져 나갔다. 1974년 리영희 씨가 펴낸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이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내용은 실상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문화혁명에 대해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인간개조 실험’이라고 한다거나, ‘마오쩌둥이 민중과 자신을 직결시킨 혁명’이라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공산주의 중국을 우호적으로 보는 시각은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도 한때 팽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1997년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공산주의 흑서’를 펴내 공산주의 정권 아래 살해당한 사람의 수를 집계했다. 중국은 6500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기간에 사망한 3800만 명이라는 수는 중국 당국이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인류가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살해당했다.
반면 리영희 씨는 끝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타계하기 전인 2005년 펴낸 책 ‘대화’에서 ‘중국 인민의 발자취는 전 인류의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낸다’고 주장했다. 문화혁명 정보의 오류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리영희 개인 차원에 그친 일이면 몰라도 그를 ‘사상의 은사’로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이 있는 상황에선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