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세상을 바꿉니다]<5>일그러진 마음, 비뚤어진 말 스포츠 선수 막말 이중고
선수들에게 막말을 하는 건 팬뿐만이 아니다. 스포츠 현장에서는 과거부터 훈련 효과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감독이나 코치, 선배들에 의한 욕설, 폭행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아직도 이런 관행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훈련 과정에서 “그것밖에 못하냐”란 코칭스태프의 막말을 견디고 경기장에 나서면 팬들이 던지는 또 다른 막말이 이들을 기다리는 셈이다.
실제 현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체감하는 막말의 수준은 어떨까. 본보는 국내 4대 프로스포츠 선수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남자 야구선수 29명, 남자 농구선수 23명, 남자 축구선수 17명, 여자 농구선수 16명, 남자 배구선수 15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 폭언 훈련, 악성 비난… 이중 막말에 시달리는 선수들
팬들의 과도한 비난은 선수들의 플레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설문에 응한 선수들의 23%는 경기 전 접한 팬의 막말 때문에 경기 결과나 플레이에 영향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 적이 아주 많다고 답한 선수도 9%나 됐다.
한덕현 중앙대 의대 교수(스포츠심리학)는 “막말을 들은 선수는 심리적으로 위축돼 실제 역량보다 20∼30% 떨어지는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들었던 비난을 경기 중에도 자꾸 떠올리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비하 심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야구 선수가 큰 스윙을 해야 하는 시점에 작은 스윙을 하거나 빨리 뛰어야 하는 순간 다리가 뻣뻣하게 굳을 수 있다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선수들은 가족을 비방하는 것과, 사생활과 관련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꼽았다. 복수 응답이 가능한 질문에서 선수 68명이 이같이 답했다. 이어 경기 결과에 대한 조롱(35명), 경쟁상대팀 팬들이 퍼붓는 사기를 떨어뜨리는 비난(8명), 성희롱성 발언(4명) 순이었다. 이들이 직접 들어본 막말은 “그러고도 프로 선수냐”라는 조롱이나 “그만둬라”란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팬들의 막말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나 선배들에 의한 내부 폭언도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의 46%가 이로 인해 운동을 그만둘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우리나라 스포츠계 막말 문화의 가장 큰 원인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지도자의 관행적인 폭언과 폭행(34명), 선후배 간의 강압적인 위계구조(20명)를 꼽았다. 팬들의 과도한 막말과 비난 문화가 더 큰 문제라고 답한 선수는 48명이었다.
○ 성과 집착 사회가 반영된 일그러진 자화상
스포츠계의 막말 문화는 승부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조현익 단국대 교수(스포츠경영학)는 “팀의 성적에 따라 감독의 유임 및 해임 여부가 결정되고 선수의 부모도 자녀를 운동에만 ‘다걸기(올인)’시키다 보니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팬들 역시 승패에만 집착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매일 명확한 성적표가 공개되는 스포츠의 특성상 승패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런 현상이 생겨나기 쉽다. 주의하지 않으면 스포츠계 전체가 폭언으로 멍들 수 있다.
선수들은 막말이 선수 개인뿐만 아니라 스포츠계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인식했다. 복수 응답이 가능한 질문에서 많은 선수(44명)는 막말의 가장 부정적인 효과로 선수의 사기저하로 인해 성적을 떨어뜨리는 것을 꼽았다. 또한 막말 비난은 팬들이 선수들을 인격적으로 보지 않고 함부로 대하게 하는 비인격적 사회인식을 형성한다는 응답(35명)도 많았다. 막말을 하며 선수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이 계속될 경우 선수에 대한 폭행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로 인해 막말이 폭행 같은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답한 선수들(25명)도 있었다.
이들은 “선수이기 전에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고 존중한다면 선수들을 향한 인격 모독 막말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한 야구선수는 “플레이가 미숙하더라도 믿고 다독여주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