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이종찬 회고록]〈1〉1945년 8월 15일 중국 상하이
《 김대중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78)은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이종찬의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의 6형제는 40명이 넘는 식솔을 모두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당 형제의 노력으로 세워진 무장독립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 살아 돌아온 우당 형제의 식솔은 20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열 살 이종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 가족사로 인해, 이종찬은 김구 김규식 신채호 장준하를 동경하며 성장했다. 경기고를 졸업한 이종찬이 서울대 대신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도 그런 ‘동경(憧憬)’의 연장이었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와 이집트의 나세르 역시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동경이 아니었다. 5공 민정당 창당의 주역이면서 김대중 정부 탄생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이종찬의 길’에는 그들에 대한 동경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1945 년 11월 5일 환국길에 상하이에 기착한 임정요인들. 뒷줄 동그라미 왼쪽부터 김구 주석, 김구 주석의 며느리 안미생(안중근 의사의 조카딸), 그리고 이종찬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임정 국무위원인 이시영. 가운데 소년이 당시 열 살이던 이종찬이다. 동아일보DB
우리 농당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어 그 주변에는 일본의 압제를 피해 망명한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과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서 온 사람들, 볼셰비키혁명으로 쫓겨난 러시아인 등 국제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평소엔 “하오하오(好好)” 하다가도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난민들을 향해 “왕궈누(亡國奴)”라고 비하하곤 했다. 나라를 빼앗겨 종살이하는 놈이란 뜻이다.
“왕궈누란 말만 안 들어도 얼마나 좋으냐?”
어머니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희색이 만면했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곧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흥분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9월이면 중국소학교의 3학년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곧 귀국할 텐데 한글 공부만 하면 될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어머니가 고생해 마련한 우리 집은 3층짜리였는데, 정작 주인인 우리는 3층 꼭대기에 살고 나머지는 세를 주고 있었다. 2층에는 젊은 중국인 은행원 부부가, 1층에는 고국에서 와 ‘시라카와(白川)’라는 창씨 명을 쓰는 아편장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시라카와’는 말하자면 일본 경찰이 우리 가족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 ‘시라카와’ 가족은 광복 다음 날 온다간다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비로소 우리 가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야 매일 감시받고 쫓기는 처지에서는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 자체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나의 선친(이규학)은 1910년 12월 아버지(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를 따라 가솔 40여 명과 함께 지금의 지린(吉林) 성 류허(柳河) 현에 망명했다. 엄동설한에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마차에 태우고 압록강을 건널 때 열다섯 살의 아버지는 이미 가족을 보호해야 하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할아버지는 누대로 내려온 재산을 정리한 돈으로 그 이듬해 그곳에서 논밭을 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독립운동에 ‘무력’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도 그 학교를 2기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만주와 상하이를 포함해 중국 대륙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간 우리 집안의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인네들을 포함해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필설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도 우당 할아버지는 고종의 중국 망명계획을 세우고 1918년 국내에 잠입했다. 중간에서 역할을 한 분은 고종의 측근 조남승이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이자 고종의 매제인 조정구의 장남이었는데, 조정구는 한일강제병합 때 수작(授爵)과 은사금을 거절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당시 이회영-조남승의 비밀대화는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조남승의 여동생 조계진의 혼담으로 포장됐다. 실제 두 분은 결혼하셨는데, 그 두 분이 바로 나의 부모님이시다.
고종의 망명계획은 그의 급작스러운 승하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 뒤 우당 할아버지는 신혼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그해 4월 상하이로 자리를 옮겨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나의 부모님은 그렇게 해서 26년간 상하이에서 살았고 나도 거기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중국 인사들에게 “나는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농담을 하곤 한다.
그때 상하이 한인사회의 최대 관심사는 충칭(重慶)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언제쯤 귀국을 위해 상하이로 오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중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 관계자와 그 가족들은 13년 만에 이뤄지는 이 상봉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라를 되찾았다’는 감격에 뒤이어 ‘이제는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임정 관계자들로부터 직접 듣기를 고대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벌써 몇 주 전부터 임정의 할아버지들이 입을 옷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다. 이분들은 중국인으로 변장하느라 늘 중국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독립을 한 마당에 차마 그 옷을 계속 입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객지에서 한복을 짓는 일도 불가능했다. 결국 아버지는 원형묵(元亨默) 선생 등 동지들과 의논해 양복을 마련하기로 했다.
나의 부모님을 포함해 여러 어른들이 백범 김구의 양복은 그분 체격대로 크게, 성재 이시영(나의 작은할아버지)과 우천 조완구(어머니의 당숙) 할아버지의 양복은 역시 그분들 체격대로 작게 마련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부모님은 밤새 이 양복들을 놓고 비교해 보았고, 거기에 알맞은 흰 셔츠와 내의, 양말은 물론이고 코트와 흰 비단머플러까지 모두 준비했다. 이 옷들을 트렁크에 넣어 광복군 경위대 이백건 아저씨를 통해 충칭으로 미리 보냈던 것이다.
기다리던 날이 왔다. 11월 5일, 광복된 지 석 달 가까이 지나 임정요인 일행이 상하이 비행장에 내린 것이다. 당시 프로펠러를 단 미군 군용기가 그렇게 커 보일 수 없었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나는 처음 거무스름한 얼굴에 바윗덩이같이 우뚝 선 백범 김구 주석, 선비와 같은 우사 김규식 부주석, 이미 노년에 접어들어 등이 굽은 성재 이시영 할아버지, 몸집은 작지만 대쪽처럼 꼬장꼬장한 우천 조완구 할아버지, 거함처럼 세상을 품을 듯한 조소앙, 풍채 좋은 신익희, 고집스러운 유림 등 여러 선생들이 차례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들은 모두 우리 집에서 마련한 그 양복을 입고 계셨다.
내가 처음 대면한 백범은 얼굴이 검고, 거칠고, 체격이 건장해 보였다. 그는 아버지를 포옹하다시피 악수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어머니에게도 위로의 말을 했다. “다들 고생했네, 정말 이렇게 다시 보니 광복이 된 것을 실감하겠네!” 그의 말은 짧았으나 힘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임정요인들이 아니라 뒤에 수행한 젊은 광복군 장교들이었다. 카키색 군복에 모자를 약간 삐딱하게 쓴 이분들, 장준하, 윤경빈…. 얼마나 멋있던지 ‘나도 저런 군복을 입어 봤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임정요인들은 서울로 귀국하기까지 약 보름동안 상하이에 머무셨다. 상하이는 임시정부의 발상지, 교민들은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어느 날 백범 김구 주석이 귀국보고회를 개최한다 하여 나는 부모님을 따라갔다. 소년인 나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른들은 킥킥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 라사복(羅斯福)이가 영국 수상 구길(球吉)이를 만나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합국의 승인하에 고국에 돌아가 한시바삐 정부를 세울 것입니다.” 기대에 부풀어 말씀을 하신 것인데, 그만 루스벨트와 처칠의 이름을 중국식 발음으로 표현하는 통에 청중들이 웃었던 것이다. 하기야 워싱턴을 ‘화부(華府)’라 하고, 모스크바를 ‘막부(莫府)’라 하던 때여서 웃을 일도 아니었지만 그분의 말씀이 너무 진지하여 작은 가십거리도 웃음을 산 것 같다. 김구 주석은 정식 학교를 나오지 않아 언변도 어눌하고,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도 능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나라의 장래와 꿈에 대한 것이었다. ‘문화국가론’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 상하이에서 만난 분 가운데 암살당한 분도 있고, 많은 분이 북한에 납치되어 불행하게 생을 마쳤다. 나는 그렇게 우리 현대사의 서장(序章) 속에서 어린 시절을 시작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