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동서대 석좌교수
하지만 최근 뒤늦게 읽은 서적 ‘건국 60년의 재인식’ 속에 있는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전상인 교수에 따르면 종전 직후, 즉 8월 15일 보통 한국인은 독립했다거나 해방됐다는 감격보다 ‘아,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을 더 크게 느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 이제는 징용 안 가도 되겠다, 솔뿌리 캐지 않아도 되겠다, 방공호 파지 않아도 되겠다’, ‘이제 전장에 안 끌려가는구나’와 같은 기쁨이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통계에 따르면 종전 때까지 조선인의 군인 군속은 24만2000명에 이르고 그중 2만2000명이 사망 혹은 행방불명(미귀환)됐다. 훈련을 끝낸 이의 상당수는 이오(硫黃) 섬을 시작으로 태평양의 격전지에 파견됐다.
하지만 사할린, 일본 본토, 태평양 제도의 광산, 공장, 군사시설 등에 동원돼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중노동에 종사한 조선인 노동자의 수는 더 많다. 군인의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예가 1944년 11월에 착공한 나가노(長野) 현 ‘마쓰시로(松代) 대본영’이다. 본토 결전용으로 준비된 지하사령부 건설을 위해 징용된 노동자는 당초 조선인 7000명, 일본인 3000명이었고, 얼마 안 있어 각 1만 명으로 확대됐다.
‘여자정신대’도 전시 동원의 한 종류였다. 조선에서도 1944년 3월부터 관 알선의 ‘여자(근로) 정신대’가 징모(徵募)됐는데 당초부터 “정신대로 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강제연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논하려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일본군과 행동을 함께했기 때문에 징용이든 모집이든 위안부 또한 전시 동원의 대상이었음은 틀림없었다.
앞부분에 지적한 것처럼 조선인에게는 전쟁이 광범위하고 잔혹한 전시 동원이었음을 고려하면 한국인이 ‘위안부는 강제적으로 연행됐다’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전 위안부에 의한 증언과 소송에 의해 강제연행은 확고부동한 ‘사실’이 됐다.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을 듣고 이 문제는 이미 독도-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 문제와 같이 해결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일의 인식 차원에서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문제를 똑바로 해결할 때… 내년 한일 수교 50주년도 양 국민이 마음으로부터 함께 축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어떻게 될까.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