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1> 대한민국 百年大計세우자 ―미래전략 컨트롤타워 안 보인다
아시아 유일의 성공한 근대개혁으로 평가받는 메이지유신. 이 개혁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비롯한 지사들이 ‘서구 강대국처럼 부강한 일본’이라는 미래상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선진국이 지금의 위치로 도약하게 된 것은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해 왔기 때문이다. 10년 후, 100년 후를 준비하는 나라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략을 세울 수 있으며, 미래예측을 통해 축적된 지식정보를 국가적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 미래 비전을 통해 일관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다.
미래전략에 있어 한국의 현주소는 서글플 정도다. 일부 기술 분야에서만 미래전략 수립이 있을 뿐 국정 전반을 짚는 미래 설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세기 중반부터 민간연구소와 정부가 함께 미래상을 그려가는 미국, 새 정권에 꼭 미래전략 보고서를 만들게 하는 핀란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적인 미래전략 수립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자문기구로 미래기획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권 없는 자문기구는 정권 말기가 되자 가동을 멈췄다. 지금은 온라인상의 웹사이트마저 사라진 상태다. 국가미래전략센터를 만들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바뀌거나 장관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미래예측을 위해 전문가가 모인 독립적인 ‘싱크탱크’ 형태의 미래전략연구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선진국들은 국가 미래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한 국정운영추진체제를 마련해 가동하고 있다. 영국의 미래전략청, 미국의 정보위원회 등이 그 예다.
김성태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은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사후 대응하는 데 국정 에너지를 모두 쓰고 있다”며 “국가적인 미래전략기구를 만들어 사전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이런 소모전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 5년마다 정부 조직개편 되풀이
우리나라가 미래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벌어진 실패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외환위기다. 당시 있던 30대 그룹 중 17곳이 지금은 사라졌고 1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당시 실업자 중 상당수는 재기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200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는 ‘(외환위기로) 동화은행이 퇴출된 지 만 6년. 당시 중산층이었던 동화은행 직원들은 현재 5명 중 1명이 빈곤층으로 추락했다. 소득이 6년 전 임금보다 하락한 사람은 65.5%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적자, 외채 누적, 가용 외환보유액 부족 등 사전 징후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불과 1년 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축하하며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의 장밋빛 전망을 제시했다.
미래전략 부재가 불러온 또 다른 실패 사례는 인구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이 되면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서는 고령사회에 진입한다. 2025∼2030년에는 노인인구 비중이 20%가 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는 이런 흐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1960년대부터 산아제한정책을 펼쳤다.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61년 국무회의록 ‘가족계획 추진에 관한 건’에서는 당시 정부가 인구팽창을 경제성장의 저해 요인으로 언급한 내용이 담겨 있을 정도다.
정부가 출산 장려 쪽으로 돌아선 건 2000년대 초중반 이후다. 2006년에 작성된 국무조정실의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안) 보고’ 문건에는 저출산으로 인한 급격한 고령화를 우려하는 내용과 출산 장려로 완전히 전환한 인구정책이 수록돼 있다.
출산정책은 20∼30년 후에야 효과가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인구 정책은 타이밍을 한참 놓쳤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래전략이 없어 장기적인 정책 수립과 유지가 불가능한 경우도 수두룩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국가 백년대계인 교육정책이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살펴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정부 수립 이후 60년간 대입시험제도는 늘 5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바뀌었다.
정책만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뒤따르는 조직개편은 시간적 금전적 낭비를 부른다. 또 소관 부서가 자주 바뀌면 정책이 일관성을 가질 수 없다.
정보통신부에 있던 정보통신정책국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방송통신위원회로 이관됐다가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가 신설되면서 다시 이관됐다. 미래부 공무원 A 씨는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연속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이라며 “부처가 신설되고 1년은 내부에서 서로 눈치 보느라 시간 다 보내고, 2년 정도 일에 힘 쏟다 보면 다시 대통령 선거철이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처가 유지되는지 등 각종 소문을 파악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고 고백했다.
▼ 미래 대응 잘하면 예산 효율적 분배 가능 ▼
미래전략의 부재는 단기 실적주의가 판치게 하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단기 실적에 몰두해 장기적인 국가경쟁력을 고갈시키는 ‘약탈적 리더’를 양산하기도 한다. 특히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전문가들은 “독재정권 출현을 막기 위해 도입된 단임제를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선우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는 “짧은 기간 안에 급하게 성과를 내려면 장기적으로 정책을 세울 수 없다”며 “이제는 민주주의가 성숙한 만큼 정치권이 국가를 위해 크게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명재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모든 정책이 ‘리셋’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미래예측, 왜 필요한가
한 번 가본 길과 처음 가는 길은 다르다. 국가 차원의 미래 예측이 없는 나라는 바로 눈앞만 바라보며 손발로 더듬어 길을 찾는 사람과 같다. 국가의 미래계획을 잘 수립하면 작은 불씨가 큰 산불이 되기 전에 미리 잡아 저비용 고품질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김성태 교수는 “최근 여러 재해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데 사전에 대응을 잘하면 예방이 가능하다”며 “미래 대응을 잘하면 예산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전략적으로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미래사회를 예측하면 필요한 정책이나 제도를 미리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미래전략은 자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미래전략의 가장 큰 효용이며, 세계 강대국들이 미래전략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과 대기업 상당수는 미래연구 전문조직을 갖추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른 환경에서 미래를 얼마나 예측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래를 100% 정확히 맞히는 게 아니다. 여러 가능성을 상정해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정해 놓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별취재팀>
▽팀장 하종대 편집국 부국장
▽팀원 문권모(소비자경제부) 성동기(국제부)
이훈구(사진부) 차장, 배극인(도쿄)
전승훈(파리) 이승헌(워싱턴) 특파원,
우경임 이샘물(사회부) 박창규(소비자경제부)
김수진(뉴스디자인팀) 하승희(편집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