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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힘들고 돈 못번다고 ‘흥부외과’된 흉부외과 살리려면

입력 | 2014-08-26 03:00:00


흉부외과 의사는 환자가 위험한 그 순간에 신속한 선택을 해야 한다. 한 대학병원의 의료진이 대동맥판막협착증 수술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필자가 3년차 전공의였던 30년 전의 일이다. 선천성 심장기형을 가진 한 돌짜리 환자를 치료할 때였다.

당시는 심근보호 기술이나 수술 후 혈역학 관찰 등이 엉성하던 시절이어서 중환자실 담당 전공의의 지식과 끈기, 도전정신이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였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침대 옆에 자석처럼 붙어 사경을 헤매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항상 밤이 무서웠다. 혼자 의사결정하고 혼자 시행해야 하느라 눈 한 번 붙일 수 없는 한계 상황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기가 지금도 기억나는 건 내가 침대에 딱 붙어서 연속해서 잠 한 번 자지 않고 같은 창문으로 새벽을 세 번 맞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기는 무사히 집으로 갔다. 지금쯤 아이는 아빠가 되어 있으리라. 당시 경험으로 필자는 포기 없는 도전과 체력의 한계 체험이란 시험대를 스스로 통과했다고 자부했다.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환자는 인조 혈관의 수명이 다되어 재수술이 필요한 10대 후반 소년이었다. 수술 도중 혈관 하나가 터졌다.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은 심장 정지 후 5분 정도로 기껏해야 총 15분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는 환자의 생존을 위해 해야 할 수만 가지 일 중에 기껏해야 2, 3가지 정도만 할 수 있다. 경험 많은 외과의사의 순간 우선순위 결정과 선택의 ‘묘기’가 절실하다.

우선 출혈을 감당할 수 있는 수혈 통로 확보가 급하다. 인공심폐기를 장착할 수 있도록 대동맥과 대정맥에 도관을 삽입하는 일도 급하다. 심장과 폐의 기능을 대신할 순환보조의 신속한 시작이 초를 다툰다. 또 대사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급속히 체온을 낮추어야 한다. 이제 출혈 부위를 찾아 지혈을 하여야 한다.

다행히 환자는 후유증 없이 집으로 갈 수 있었고 필자는 외래에서 그 소년을 만날 때마다 혼자서 속으로 슬며시 웃는다. 이런 경험이 없는 의사는 흉부외과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새내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흉부외과는 심장 폐 등 생명과 직결되는 수술을 한다. 하는 일이 긴박하다 보니 의학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필자는 폼 나는 흉부외과 의사가 주인공인 닥터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초를 다투며 생명과 사투를 벌이는 흉부외과에는 극화될 것도 없고 멋있을 것도 없다. 흉부외과 의사의 삶은 노력과 도전과 끈기로 자신을 끊임없이 입증하고 그 결과 의사 자신과 환자가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신속과 완벽함이 으뜸가치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타인의 두세 배의 속도로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잠재력의 소유자라는 위안도 있다. 이렇듯 강도 높고 군더더기 없는 삶이 있는 흉부외과의가 나는 좋다.

하지만 10년 넘게 흉부외과 전공의 지원율은 꼴찌를 맴돌고 있다. 큰 대학병원 아니면 취직할 데도 없고 수술 난이도에 비해 수가도 낮다. 일은 힘들고 돈은 못버니 ‘흥부외과’라는 자조섞인 농담까지 나올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필자와 같은 흉부외과 마니아들이 꽤 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누가 뭐래도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것이 마니아의 특성 아닌가.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해피 노동 고임금’이라 지원을 기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흉부외과 마니아가 사라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20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의료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예일대 의대 출신 친구를 최근 미국에서 만났다. 미국에서는 흉부외과 의사의 위상이 변함없이 하늘을 찌른단다. 지원자도 많고 여전히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필자보다 4년 아래인데 벌써부터 은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노후 대비로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큰 농장을 구입했단다. 이 친구를 보면 분명히 흉부외과를 너무도 아끼는 마니아가 분명했다. 의사는 미친 듯이 일에 몰입하고, 사회 시스템은 환자뿐 아니라 의사들의 보상과 행복 추구에도 우호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왜 폼(?) 나는 우리가 기피 걱정을 해야 하는지 잠시 혼돈스러웠다.

미국 시스템은 우리와 뭐가 다를까?

첫째,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흉부외과 의사의 역할을 좁고 깊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깊이 파면 팔수록 일이 더 재미있어진다. 좁은 범위의 일에만 관심을 두어도 되기 때문에 여유롭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필요할 때마다 환자를 중심으로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 있도록 ‘부품화’되어 있다. 흉부외과 의사는 수술반장으로서 본인 수술이 성공하기 위한 지원을 정의하고 수술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둘째, 오는 인재를 받는 수준이 아니라 인재를 찾아 나선다. 고교생부터 흉부외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경험의 기회를 주고 있다. 흉부외과 마니아가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 제공되고 있다. 그에 반해 요즘 한국의 젊은 의대생들은 ‘칼 출근, 칼 퇴근’의 근무 형태를 선호하고 금전 보상에 대한 가치 부여가 높은 것 같다.

셋째, 흉부외과 의사도 집안의 가장이면서 사회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능한 보상과 행복의 추구도 당연한 권리이다. 미국 의사는 흉부외과 업무를 제외한 개인적인 삶에도 불만과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행복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대책은 간단하다. 무엇보다 훌륭한 팀이 구성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의사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일을 쪼개고 보상을 현실화해야 한다. 그래야 업무강도가 떨어지고 시간 여유가 생겨 자기계발의 기회도 증가한다.

이 밖에도 흉부외과 마니아를 조기 발견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흉부외과 의사의 활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해외 진출도 그중 하나다. 수가를 현실화하고 업무강도를 고려한 ‘의사수술비’가 인정되어야 한다. 첨단의료 로봇수술 기술, 흉강경수술 기술 등의 교육을 위한 시뮬레이션 센터가 필요하고 수련교육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수술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전임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마니아들이 즐길 수 있는 일이 충분하고 보상도 만족스럽다면 왜 마니아가 사라지겠는가?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