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섬에서는 은퇴한 부모가 살고, 고향을 떠난 3남매는 각각 동경에서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늙은 부모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동경에 다니러 오는데, 단 일주일도 모처럼 만난 부모와 시간을 함께해줄 자녀는 없다. 물론 누구의 잘못이랄 수는 없다. 다만 대도시에 사는 자녀는 출세를 했으면 출세한 만큼,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으면 또한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바쁠 따름이다. 결국 쓸쓸하게 끝나는 그 영화는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돌이켜보면 우리의 부모 세대는 가난 속에서도 부모를 봉양했고 아이들을 서넛 이상 낳아 키웠다. 그런데 지금은 50년 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배가 늘었어도 부모를 건사하기는커녕 비싼 교육비 때문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부모도 모시지 못하겠고 자녀를 낳아서 키우기도 어렵다면 50년 전보다 더 가난해진 것일까.
지난 일요일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더니 사업으로 성공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 친구는 1984년에 아버지로부터 2억 원의 빚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아들이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지만 아버지가 빚쟁이로 남는 게 싫어서 열심히 일해 6년 만에 다 갚았고, 그 이후 돈을 모아 작은 사업체를 일궜다고 했다.
“만약 갚아야 할 빚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죽기 살기로 일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할 테니까 오히려 아버지에게 감사하지.”
유산은 다투어 물려받으려 하지만 누가 부모의 빚을 떠안으려고 할까. 모인 친구들은 아버지와 자신의 명예를 지킨 친구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가족의 해체가 진행되는 쓸쓸한 시대지만 올해도 여전히 추석을 앞두고 성묘객들로 휴일 고속도로가 정체되었다는 소식이 반갑다. 적어도 내게 소중한 사람은 지킬 수 있어야 사람이다.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