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한기흥]정도전의 터에 선 프란치스코

입력 | 2014-08-30 03:00:00


한기흥 논설위원

시간과 공간의 상징성에 생각이 많아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을 집전한 때는 광복절 다음 날이고 장소는 서울 광화문 일대였다. 교황의 뒤로 경복궁이, 앞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며 조선의 흥망, 광복과 분단 등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순교자들을 기려야 할 그 순간에 불경하게도 나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한양의 궁성과 거리를 설계하고 이름을 붙인 정도전을 곰곰이 생각했다. 권문세족들의 부패로 망해가는 고려를 부정하고 민본위민(民本爲民)의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역성혁명을 주도했던 사람. 왕이 정사(政事)를 보는 전각의 이름을 근정전(勤政殿)이라고 지어 부지런히 백성들을 돌볼 것을 주문하고, 4대문과 종각에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한 자씩 넣어 작명한 이상주의자. “임금보다 존귀한 것이 천하민심”이라고 했던 그가 뜻대로 왕이 아닌 유능한 재상이 중심이 된 나라의 기틀을 온전히 다졌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백성들의 삶은 덜 고달팠을까….

정도전 등 왕권 위협 세력을 아버지(태종)가 무자비하게 제거한 덕에 세종은 별 견제를 받지 않고 후대가 우러러보는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세종 같은 지도자를 더는 낳지 못했다. 충무공 동상 아래서 농성 중인 세월호 유족들은 이 나라에 그와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다. 이번에 시복된 분들을 포함해 박해로 숨진 1만 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억압과 수탈에 시달렸던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반상(班常)과 남녀 구분의 벽을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처음 접한 그리스도의 교리는 벼락같은 개안(開眼)이었겠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이방원에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도전이 복권된 것은 임진왜란에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던 고종 때였다. 국운이 기울 때에 이르러서야 나라를 세우던 때의 초심을 되돌아봤지만 너무 늦었다.

어제가 경술국치 104주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장인 1910년 8월 29일 순종실록은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끝난다. 망국의 치욕에 사관(史官)은 더이상 운필(運筆)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 후 35년의 일본 강점과 그 두 배에 이르는 남북 분단 기간을 합쳐 비정상의 역사는 한 세기가 넘게 이어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지만 어두움도 깊다.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너무도 아득하다. 불신과 갈등, 차별, 불통의 합병증은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막막하다. 물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상에 정의가 설 곳은 변변치 않다.

이런 때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가톨릭 수장으로서 권위를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다. 진심 어린 따뜻한 눈길과 미소, 포옹에 가슴이 뭉클했고 “깨어 있으라”는 당부에 용기를 얻었다. 스스로를 낮출수록 높아진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그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많은 시대가 갈구했던 염원이다. 신(神)도 천국보다는 그런 꿈이 이뤄지는 땅을 바랄 터다. 정도전이 꿈꿨던 세상과 교황이 가리키는 세상이 광화문에서 만났다. 진정성을 갖고 낮은 곳부터 보듬어야 할 숙제가 크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