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서울대 재학생 ‘로스쿨 이상열풍’ 왜?
1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열람실이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여름방학이었지만 17일 치러진 법학적성시험(LEET·리트)을 앞두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언어와 수학, 추리논증 등 리트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다. 모든 전공에서 ‘최고 학부’임을 자부하는 서울대지만 로스쿨 쏠림 현상은 매년 심화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경영대생 A 씨는 올해 딘스 리스트에 뽑혀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그가 앉은 테이블에는 다른 학생 5명과 교수 2명이 함께 앉았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말없이 음식만 먹고 있던 그때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들은 앞으로 졸업하고 뭐 하고 살 건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의 머릿속에선 ‘한국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최고경영자(CEO)가 되고 싶다’ ‘학업을 계속 이어가 학문적인 성과를 내고 싶다’는 모범답안만 맴돌았다.
A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판에 박힌 듯한 대답을 하긴 싫었다. 내 주관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고 털어놨다. 차가워진 분위기. A 씨 역시 속으로 ‘이거 말 잘못한 거 아닌가’ 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잠시 후 상황은 반전됐다. 기다렸다는 듯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학생 4명도 “나도 로스쿨에 가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교수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A 씨는 “그나마 취업이 잘된다는 경제학부나 경영학과가 이 정도인데 인문대, 사범대 같은 곳은 (로스쿨 쏠림 현상이) 더 심한 게 현실이다. 과거에 고시 준비하듯 어지간한 학생들은 모두 ‘로스쿨에 한번 도전해 보자’는 게 요즘 서울대 분위기”라고 전했다.
사실 다른 대학에서는 로스쿨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을 위해 치러야 하는 법학적성시험(LEET·리트) 응시자 수는 최근 하락세로 돌아섰다. 연간 1500만 원이 넘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로스쿨을 수료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취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서울대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요즘도 서울대 곳곳에서는 로스쿨 논술 및 면접에 대비해 그룹 스터디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로스쿨을 향한 서울대생들의 ‘특별한 애착’은 실제 수치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국내 최대 규모의 로스쿨 준비학원인 메가로스쿨의 ‘연도별 서울대 수강생 현황’에 따르면 서울대 출신 수강생 수는 올해 355명으로 지난해(272명)에 비해 30.5% 늘었다. 반면 약대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학생 수(172명)는 오히려 지난해(301명)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서울 신림동의 ‘합격의 법학원’ 박어령 강사는 “서울대생들은 다른 학교 학생에 비해 학원 수강보다 혼자 공부하거나 그룹 스터디를 하는 비율이 높다”며 “이 때문에 실제 로스쿨 준비생 수는 더 많다”고 설명했다.
“로스쿨은 취업난 돌파용”
로스쿨은 2009년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출범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로스쿨 출신은 사법시험 출신에 비해 관련 직업에 취업하는 데 보이지 않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왜 많은 서울대생들이 로스쿨 준비에 매달리는 걸까.
로스쿨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은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로스쿨을 다니면 그나마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입장을 보였다. A 씨는 “돈을 잘 번다는 회계사, 변리사도 옛날만 못하다. 대기업도 이제는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이 됐다. 반면 로스쿨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 좋은 곳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느냐”고 말했다. 법조인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평범한 샐러리맨보다는 낫다는 얘기였다.
사법시험의 선발 인원이 축소되고 조만간 폐지를 앞두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로스쿨 쪽으로 눈을 돌린 학생도 적지 않다. B 씨(28)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뒤 오직 사시 합격을 목표로 20대를 보냈다. 그러나 끝내 ‘최종 합격’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는 올해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틈틈이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다. B 씨는 “학교 다닐 때 사시 공부를 하느라 다른 건 아무것도 못했다. 이제 내가 믿을 건 로스쿨밖에 없다”고 했다. ‘고시 낭인’이 ‘로스쿨 낭인’으로 이름만 바꿔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로스쿨로 방향을 바꾼 학생들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B 씨는 “고시생 대부분은 학업 관리를 제대로 못해 학부 성적이 좋지 않다. 이 때문에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로스쿨’은 언감생심이고 지방 로스쿨 등으로 하향 지원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B 씨는 다른 어려움도 있다고 했다. 그는 사시를 준비할 때 법전과 판례 외우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로스쿨 1차 관문인 리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언어 수학 추리논증 풀이 공부를 해야 한다. 법 이외의 분야까지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B 씨는 “문제를 풀 때마다 큰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제자가 로스쿨로 떠나는 모습에 허탈한 교수들
많은 서울대생이 로스쿨 진학에 매달리는 현실을 두고 지도교수들은 “개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능성 있는 제자들에게 애정을 다해 가르쳤는데 이 중 십중팔구는 로스쿨을 준비한다는 거였다.
사범대의 D 교수는 3년 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던 한 학생을 로스쿨로 떠나보냈다. “꼭 교수를 시켜주겠다”고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D 교수는 “능력 있는 제자가 다른 길을 선택하겠다고 했을 때 정말 말리고 싶었다. 끝내 ‘떠나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허탈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렇게 로스쿨로 방향을 바꾼 이들은 과연 얼마나 만족하고 있을까? 동아일보 취재팀과 만난 로스쿨 재학생과 졸업생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를 졸업한 뒤 한 로스쿨로 진학한 C 씨(24·여)는 “대기업에 가기 싫어 로스쿨로 진학했지만 성적도 안 좋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며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겠다는 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대 로스쿨 졸업 후 한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30대 남자 변호사 D 씨 역시 “졸업 후 내게 돌아오는 건 ‘로스쿨 출신’이라는 주홍글씨와 차별대우였다”고 말했다. 아직도 한국의 로스쿨이 자리를 잡기에는 먼 길이 남아 있었다.
이철호 irontiger@donga.com·최혜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