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3세대, 종전 3세대… 韓日 젊은이들 어깨 무겁다”
지난달 19일 경남 합천의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을 방문한 ‘한일 성신 학생통신사’ 소속 대학생들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당한 할머니들로부터 피폭 당시의 상황 등을 듣고 있다. 합천=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그 ‘성신’이라는 이름에 ‘통신사’가 붙은 한일 대학생 교류 행사가 있다. ‘한일(일한) 성신 학생통신사’다. 고려대와 와세다대 아시아연구기구가 주관한다. 올해로 여섯 번째. 지난해까지는 매년 일본에서 열렸고, 올해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와세다생 11명과 게이오대생 1명, 고려대생 9명이 ‘공생·평화에의 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난달 18일부터 22일까지 함께 활동했다. 올 행사는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 등이 후원했다.
입국 이틀째인 지난달 19일 그들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경남 합천군의 ‘원폭피해자 복지회관’. 그 전날 오후 서울에서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명예회장의 강의도 들었다. 학생들은 복지회관을 방문한 뒤 숙소인 해인사관광호텔에서 4개 반으로 나눠 제1차 의견교류회를 열었다.
원폭피해 과거 아닌 현재의 문제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내 조모가 떠올라 슬펐다. 왜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이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가.”
“할머니들이 얘기를 멈추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사실을) 남기고 싶다는 뜻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느꼈다.…일본은 증오해야 할 대상이지만, 우리에게 친절했던 것은 일본과 일본인을 분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정치가들은 옛날 일이라서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할 게 아니라 자신의 일로 다뤄야 한다. 한국인은 원폭피해자 문제를 잘 모른다. 구조적인 문제인가, 무지인가.”
학생들은 피폭당한 할머니들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솔직하게 자신들의 경험을 얘기해 준 데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피폭자 문제가 한국에서 별로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의외라고 했다. 합천에 간다고 했더니 ‘합천에 언제 원자폭탄이 떨어졌니’라고 묻는 친구가 있었다는 말도 나왔다. 학생들은 피폭자 문제를 좀더 이슈화하고, 조사와 기록을 통해 후대에 남겨야 하며, 한일 양국 정부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된 사람은 7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10%인 7만여 명이 한국인이고, 그중 4만여 명이 숨졌다. 한국인 생존자 3만여 명 중 2만3000여 명은 광복 후 귀국했으나 7000여 명은 일본에 남았다. 7월 31일 현재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로 등록된 사람은 2601명이고 그중 107명이 합천 복지회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합천을 ‘한국의 히로시마’로 인식하고 있다.
학생들은 원자력발전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원자력발전소를 없애는 데 동조하는 학생이 많았으나 원자력발전소를 없앴을 때의 부작용을 지적한 학생도 적지 않았다. 학생들은 원자력발전소를 갖고 있는 각국 정부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난달 21일 저녁 고려대 CJ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판문점 방문 소감과 한일관계 개선방안 등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한일 성신 학생통신사’ 소속 대학생들.
지난달 21일에는 판문점과 제3땅굴도 견학했다. 특히 일본 학생들은 말로만 듣던 남북 분단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데 대해 “긴장감을 느꼈다”며 꽤 흥분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거론한 학생도 있었다. 그날 저녁 숙소인 고려대 CJ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제2차 의견교류회가 열렸다.
“일본인은 한국의 군대문화를 모른다. 오늘 경험을 통해 일본인이 그걸 모르면 한국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이 서로 노려보고 있기 때문에 평화가 유지된다는 모순을 느꼈다. 진짜 평화는 한국이 통일됐을 때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비무장지대를 보고,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를 떠올렸다. 보통의 장소도 비극이 발생하면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견교류회는 한일 간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로 이어졌다. 한국 일본 중국의 역사 교과서를 상대방 국가에서 부교재로 쓰자는 얘기가 나왔고, 친해도 싸울 수는 있지만 무지해서 싸우면 안 되니 다방면의 교류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대학생들을 1년간 이웃국가로 유학 보내자는 제안, 한국 젊은이의 의무는 영토의 통일이 아니라 이웃국가와의 이해의 통일이라는 의견, 입시를 위해 암기만 하는 역사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 국가 간 관계보다 시민과 시민 간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슬기 씨(고려대 사학과 4년)는 “동양의 역사책에는 거울을 뜻하는 ‘감(鑑)’이 많이 붙는데, 이는 역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겠느냐”며 “한국의 광복 3세대, 일본의 종전 3세대인 우리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일관계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했다.
이들의 일정에는 대구의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서울의 탑골공원과 안중근기념관 방문도 들어 있다. 한일 간의 불행했던 역사를 직시하겠다는 뜻이다. 판문점 방문도 그 연장선이다. 올해까지 이 행사에 참여한 양국 학생은 165명. 교직원과 일반 시민까지 합치면 200명이 넘는다.
생생한 경험과 솔직한 대화 기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 개개인의 변화일 것이다. 와세다생으로 참가한 학생 중에는 재일동포도 있고, 한국인 유학생도 있다. 고려대생 중에도 일본 유학 경험자가 있다. 성장 배경과 경험이 다르므로 한일관계를 보는 시각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상대방의 입장이나 의견에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장소에서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생생한 경험을 했다.”
“한국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을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부끄럽다.”
“정치적인 사안은 민감해서 피해왔는데 솔직하게 얘기할 기회를 갖게 돼 좋았고, 편견과 오해가 대화 부족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한일관계를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한국의 현실을 보고 나의 게으름을 자책했다.”
“나는 당연히 일본 국민이 아베 신조 총리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권위자로 불렸던 재일사학자 고 신기수 씨의 딸 이화 씨도 이들과 며칠을 함께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부친이 타계하기 몇 달 전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 열기를 보고 병상에서 일본 기자와 필담으로 한 얘기를 들려줬다. “일본의 젊은이도, 한국의 청년도 베일을 벗고 교류를 시작한 것 같다. 마치 현대의 통신사가 오가는 듯해 기쁘다.” 이 말은 이 행사에 왜 ‘통신사’라는 이름이 불었는지를 웅변한다. 이화 씨는 “1차 교류회와 2차 교류회 때의 학생들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짧은 기간에 학생들이 매우 진지해졌다는 말이었다.
양국 청년들의 진정성에 미래가
그러나 이 행사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2011년 8월 제3회 행사는 일본의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성물질 누출사건을 계기로 히로시마에서 열었다. 평화기념공원 내의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에서 합동추도식을 갖고 그 옆에 조선오엽송도 심었다. 그런데 그 소나무가 올 4월 말에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일본 내의 혐한 분위기에 편승해 누군가가 뽑아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생들의 활동도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주최 측은 언젠가 같은 곳에 같은 소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을 성사시킨 이는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의 오다가와 고(小田川興) 씨다. 그는 원만한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대학생 교류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2006년 와세다대와 고려대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2009년 첫 행사 때부터 인솔자 겸 토론회를 정리하는 코멘테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현장을 보는 게 가장 좋다”며 “학생들이 이번 행사를 통해 상당한 인식 변화를 경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부산 대마도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행사를 검토하고 있다. 예산 확보가 늘 힘들지만 내년에는 조금 성대하게 치렀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대학생 통신사’를 취재하며 느낀 게 있다. 한일 간의 풀뿌리 교류를 강조하는 기사를 많이 써왔지만 그 효과를 확인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 그 가능성을 보았다. 다른 하나는 한일 양국의 전문가들이 한일관계를 논의할 때 느끼는 불안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식도 대안도 풍부하지만 말 속에 ‘가시’가 숨어 있어 조마조마할 때가 많다. 학생들의 식견은 전문가들에 비할 바가 못 됐지만 진정성이 있었다. 어른들이 제 역할을 못해 젊은이들에게 짐을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