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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이병헌, 판타지를 지켜라

입력 | 2014-09-04 03:00:00


영화 ’달콤한 인생’

이병헌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1월이었다. 그가 주연한 누아르영화 ‘달콤한 인생’의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던 서울 안국동의 뒷골목. 우리는 호된 추위를 피해 스태프가 머무는 근처 여관방에서 방바닥에 엉덩이를 깐 채 톱 배우와 기자로 만났다. 내가 대뜸 “병헌 씨랑 내가 동갑인 거 알아요?”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듯했던 이병헌은 이내 매력적으로 웃으며 “저보다 한두 살 더 어려 보이는데요?”라는 말도 안 되는 접대성 멘트를 고맙게도 날려주었다.

당시 이병헌은 얼마간 교제한 것으로 알려진 여배우와 막 헤어진 상황이었다. 나는 “진한 연애도 다시 하면 좋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병헌의 대답이 나를 사로잡았다.

“배우가 사랑에 빠지면 연기에서 미세한 느낌이 살아나요. 사랑을 많이 하거나, 더 큰 사랑을 하거나, 미친 사랑을 하거나…. 모두 배우에겐 재산입니다. 물론 연기를 더 잘하기 위해 연애를 하는 건 아니고요(웃음). 스캔들이 무서워서, 팬들이 달아날까 무서워서 연애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우와. 얼마나 멋진 남자인가 말이다. 사실, 대중은 이병헌의 멋진 외모와 중저음 목소리에도 매혹되지만, ‘내숭 떨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내 갈 길을 가는 올바르고 의리 있는 배우’라는 이병헌의 이미지야말로 사람들이 그를 변함없이 사랑해온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밥을 먹고 살지만, 배우는 판타지를 먹고 산다. 예를 들어, 송혜교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면서 착하고 다소곳할 것 같은’ 판타지를, 하지원은 ‘진솔하고 소탈하며 이해심이 깊을 것 같은’ 판타지를, 전도연은 ‘내가 어떤 비천한 짓을 해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감싸주고 사랑해줄 것만 같은’ 판타지를, 메릴린 먼로는 ‘흰색 시트가 깔린 오크침대에선 그 무엇이라도 시키는 대로 다 할 것 같은’ 판타지를, 스칼릿 조핸슨은 ‘오로지 뇌가 아닌 육체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할 것만 같은’ 판타지를 지닌다.

대중은 스타에 대해 품는 판타지와 실제 스타의 인간됨이 일치하리라 꿈꾸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조차 아니다. 하지원이 실제론 ‘얼음공주’일 수도 있고, 스칼릿 조핸슨이 책벌레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배우의 판타지는 ‘사실’보다 더욱 강력한 대중의 ‘믿음’에 기반하여 구축된다는 점이고, 그래서 배우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판타지를 죽을 때까지 지켜가고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판타지는 환상이 아닌 실체인 것이다.

나는 배우들에게 치명적인 위기는 그들의 판타지가 깨지는 순간에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착함’의 판타지를 가진 송혜교에게 ‘25억 원이 넘는 세금을 탈루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치명적이다. ‘무지막지하지만 순진하고 가정적인 남자’의 판타지를 가진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가정부와의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도 그래서 치명적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2초 안에 때려눕히는 무적의 사나이’란 판타지를 가진 액션스타 스티븐 시걸이 마피아에게 꼼짝 없이 협박당하면서 수년간 금품을 갈취당해 온 겁쟁이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치명적이다.

최근 걸그룹 멤버(21)와 여성모델(25)로부터 “50억 원을 주지 않으면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나눈 이야기를 몰래 찍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병헌이 이들 여성을 경찰에 신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협박에 굴하지 않고 범죄행위를 용감하게 신고한 이병헌의 자세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실망스러웠다. 이병헌이 유부남으로서 이들 여성에게 ‘배우로서 걸어야 할 길’이나 ‘창조경제의 빛과 그림자’, 혹은 노자의 ‘도덕경’을 이야기했더라면, 여성들이 제 아무리 스마트폰으로 몰래 촬영을 했다한들 그를 협박할 건더기조차 없었을 것이 아닌가. 자기 집도 아닌 모델의 집에서 함께 물이 아닌 술을 마시면서 뭔가 훌륭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만은 확실한 만큼 ‘정정당당하고 올바른’ 이병헌의 판타지에 금이 간 것도 사실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필자인 나에게 따져 물을 것이다. “그럼 글 쓰는 너는 백지처럼 깨끗하냐”고. 아니다. 나 절대로 깨끗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밥솥 모델도 자동차 모델도 못 한다.

그럼 또 내게 물을 것이다. “배우는 집 밖에 나가지도 말고, 술도 먹지 말고, 모르는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말라는 얘기냐”고. 바로 그것이다. 집 밖에 나가지 말라. 술도 먹지 말라. 그것이 ‘미친 사랑’이 아니라면, 모르는 여자와는 말도 섞지 말라.

세상엔 공짜가 없다. 나는 “얼굴이 알려지는 바람에 친구들과 동네에서 마음껏 떡볶이조차 사먹을 수 없는 현실이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여배우가 가장 한심스럽다. 그렇게 서러우면 배우 때려치우고 떡볶이 실컷 사먹으면 될 거 아닌가.

배우들아, 제발 판타지를 지켜주길. 알고 있니? 직장에선 구박받고 노후 대비도 제대로 못한 우리 대중으로선 당신들에 대해 품는 아름다운 판타지가 팍팍한 우리 삶의 몇 안 되는 위안이란 사실을.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