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사회부 차장
당신을 더 열 받게 하는 것은 보험사의 사고 처리 결과다. 보험사는 과실의 책임을 정확히 절반씩 나눴다. 각각 똑같은 너비의 길을 운전하다 동시에 교차로에 진입했다는 이유에서다. 항의해도 어쩔 수 없다. 사고가 난 길은 제한속도가 무려 시속 60km이기 때문이다. 30km로 서행한 당신이나 59km로 달린 상대방이나 책임은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사고에 이르지는 않아도 운전자라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한두 번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분을 삭인 채 손해를 감수한다. 경찰이 서울지역 이면도로의 제한속도를 낮추기로 한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런 억울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이는 억울한 보행자도 마찬가지다. 보행자가 차에 치였을 때 가해 차량의 과속 여부는 과실의 크기를 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해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과속이 확인되면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경찰이 편도 1차로 이하 이면도로의 제한속도를 기본적으로 시속 30km로 낮추겠다고 하자 이런저런 말이 많다. 정부는 ‘손톱 밑 가시’를 빼자며 규제 완화에 나서는데 오히려 대못을 박고 있다는 것이다. 세수가 부족해지자 경찰이 제한속도를 낮춘 뒤 단속을 강화해 범칙금을 걷어 들이려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면도로의 교통 정체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불만도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한속도를 낮춰도 단속은 지금보다 늘어나기 쉽지 않다. 현재 서울지역에서 교통 업무에 종사하는 경찰관은 약 2100명. 이 가운데 현장 단속에 투입되는 인력은 1100여 명이다. 도심 교통난 정리하기도 바쁜 마당에 이면도로의 속도위반까지 일일이 단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경찰은 교통량이 많은 이면도로의 경우 정체가 심해질 것에 대비해 부분적으로 제한속도를 높일 방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운전자의 심리적 저항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제한속도를 낮추려는 곳은 도심 한가운데 왕복 8차로 도로나 고속도로가 아니다. 바로 내 아이가 뛰어노는 골목길이다. 그리고 이곳의 속도를 낮추는 것은 당신처럼 규정 속도를 지키는 ‘착한 운전자’를 위한 ‘착한 규제’일 뿐이라고.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