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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고향

입력 | 2014-09-05 03:00:00


고향
―백석(1912∼1995)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
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집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세상살이 설움 중 가장 큰 게 병들어 아픈 것일 테다. 더욱이 객지에서 혼자 앓아누우면 외로움조차 가슴에 사무칠 테다. 고향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북관은 함경도를 이른다. 화자 고향은 평안도 정주인데 함경도 끝까지는, 지도를 보니 대략 서울에서 울산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는 쉽게 오갈 수 있던 거리가 아니다. 그러한즉 지방마다 색깔이 완연히 달랐을 것이고, 화자에게 북관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거의 이국같이 느껴졌을지 모른다. 시 속의 의원은 관공(관우)처럼 수염이 치렁치렁하고 새끼손톱을 길게 길렀다. ‘길게 돋은’ 새끼손톱이 혹시 한의사라는 직업상 필요한가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당신도 손톱을 기르면 그 요긴함을 알게 될 것이다’는 구절을 발견했다. ‘닫힌 물건을 열거나 일상생활에서 예리한 무언가 필요할 때 긴 손톱이 유용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은 손톱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많은 중국 남자가 하다못해 새끼손톱이라도 기른다는 정보도 알게 됐다. 의원의 긴 새끼손톱은 가까이 있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북관 남자의 개인적 취향일 테다. 화자 눈에 이색적인 데가 있는 그 의원은 진료를 하다가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환자의 말투나 풍기는 기색이 여기 사람은 아닌 듯한 것이다. 환자와 의원은 말을 주고받다가 한 사람의 막역지우가 다른 한 사람이 ‘아버지로 섬기는’ 고향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 인자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묵묵하니’ ‘말없이’ 맥을 보며 웃음도 ‘빙긋이’ ‘넌즈시’ 짓는 아버지뻘 연배의 의원한테서 흠뻑 고향냄새를 맡는 화자다. 특히 고향 그리울 명절이 코앞이다. 먼 나라에 사는 이들은 달을 보며 송편이 그립겠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