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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혹시 그 서류를 뺏으려고하면 권총으로 쏴도 되네”

입력 | 2014-09-06 03:00:00

[憧憬 이종찬 회고록]〈3〉통화개혁 上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 단행 당시의 국가재건최고회의 모습. 그 전해 5·16 군사정변 직후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할 때까지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한 군인통치기구였다. 동아일보DB

1962년 5월 24일, 나는 정확하게 오전 10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도착했다. 총무처에 들어가 인사를 하니, 당장 12층 유원식 장군 방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유원식 장군은 체구가 몹시 뚱뚱하고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보아 온 장성들과 달랐다. 눈에서 빛이 났고, 무언가 힘이 넘쳤다.

그는 대번에 나에게 “성재 선생이 어떻게 되시나?”라고 물었다.

“저의 종조부, 작은 할아버님이십니다.”

“알겠네. 오늘부터 여기서 근무하게.”

“알겠습니다. 장군님! 그런데 저는 최고회의 출두하라는 전언통신문밖에 받은 게 없습니다. 인사명령을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런 거 필요 없어. 내가 말하면 바로 명령이야!”

그렇게 최고회의 근무를 시작했지만 구내식당이 어디 있는지, 식권을 어떻게 사는지조차 몰랐다. 촌닭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화가 왔다. 최고회의 의장실에 근무하고 있는 전두환 대위였다.

“이 중위인가? 자네 부임했단 말 들었어, 점심 약속 없으면 같이 하지 않겠나?”

나는 곧바로 3층 의장실로 갔다. 복도를 헌병이 지키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앉게, 곧 육사 교수부의 배명국 중위하고 방첩부대의 노태우 대위가 온다고 했으니 같이 가세.”

선배장교인 전두환, 노태우 대위와는 이렇게 처음 만났다. “최고회의란 데는 복잡하고, 특히 재정위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니 말조심하게. 그리고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이권과 관련된 사람들이니깐 항상 경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당시 최고회의 의장실에는 선배가 여럿 있었다. 11기생으로는 박정희 의장의 부관 손영길, 그리고 행정비서실에 전두환, 최성택이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말고는 아무도 후배에게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고, 쓴 커피 한잔 나누자는 사람도 없었다. 전두환은 그때부터 사람 관리에 철저했다.

재정위원회는 전두환의 말대로 권력이 집중된 복잡한 곳이었다. 내방객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정부 산하 기관장이나 공공기업의 장들이 줄을 서서 유 장군을 만나고자 했다.

최고회의 유원식 재정위원의 부관으로 근무한지 4일째 되는 날, 유 장군은 나에게 서류봉투를 하나 전하면서 엄하게 강조했다.

“이 중위! 이 서류는 최고 기밀이 담겨있는 서류니깐 항상 가지고 다녀야 되네. 화장실 갈 때에도 두고 가서는 안 되네. 누가 혹시 그 서류를 탈취하려면 권총으로 쏴도 되네, 알겠지?”

그러면서 권총을 내준다. 작은 모젤 권총이었다. 서류는 느낌으로 약 100페이지가량 되는 것 같은데 밀봉되어 있었고, 간인(間印)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나는 내용도 모른 채 화장실 갈 때에도 권총과 서류를 옆에 끼고 갔고, 잠 잘 때에도 베개 밑에 깔고 잤다.

그날 이후부터 전화가 많아졌다. 천병규 재무장관이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유 장군 방에서 무엇인가 숙의하고 돌아갔다. 어느 날 오후에는 천병규 재무, 김정렴 주미공사와 함께 남산의 중앙정보부장실로 갔다. 그때 처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보았다.

다음 날에도 최고회의와 내각의 연석회의가 있었다. 회의 도중 김종필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메모를 전하니 유 장군은 회의장을 급히 빠져나가 한참 통화를 했다. 그날 저녁 유 장군은 천병규 재무,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 서재식 증권거래소 이사장 등을 불러서 한남동 외인주택으로 향했다. 중요한 회의가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유 장군은 천 재무에게 “서 이사장에게 100정도 주면 끝날 것 아니에요?” 의미도 알 수 없는 대화를 했다.

천 장관은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일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점점 일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우리가 다음 계획을 하면 어차피 해결될 것이에요.” 유 장군은 자신 있게 말했다.

다음 날 국정감사차 경기도지사실에 나가 있을 때 중앙정보부의 이영근 차장이 급히 찾아왔다. 유 장군은 화를 벌컥 내듯 큰소리로 “내가 직접 나가겠어”라고 말하고는 한국은행으로 갔다. 긴급히 금융통화위원회가 소집되었다. 회의 도중 유 장군의 일장연설이 있었다. 그 순간 증권거래소에 대출한도 외에 100억 환이 더 나갔다. 이날이 증권파동의 전주(前奏)라는 것을 나는 훨씬 후에 알았다.

6월 초에 들어서 유장군은 매일 바빴다. 어느 날 저녁 장충동 의장 공관에서 송요찬 총리, 김종필 부장, 천병규 재무장관, 유원식 장군, 김정렴 주미공사가 참석한 회의가 장시간 있었다. 헤어질 때,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다. 다음 날 유 장군은 극히 필요한 전화 이외엔 받지도 말고, 나에게 오후까지 피해 있으라고 지시했다. 라디오 뉴스에선 오후 10시에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방송이 계속 나왔다.

오후 6시 삼엄한 경비 속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각 부처 장관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발표될 때까지 누구도 회의장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오후 9시경 유 장군은 숨 가쁘게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소파에 주저앉아 긴 한숨을 내쉬면서 피식 웃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자유당 때보다 성공하겠지?” 이분이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인가? 나는 내용도 모르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9시15분경 최고회의 의사과에서 서명을 받으러 왔다, 그 문서를 힐끗 보니 ‘긴급통화조치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아! 통화개혁이로군….  

▼ “아버지 석방시켜 주겠다”… 일제 회유에 만주군 입대 ▼

아나키스트의 아들, 유원식


유원식은 이종찬의 할아버지가 우당 이회영, 작은할아버지가 성재 이시영이라는 얘길 듣고 그를 최고회의로 부른다. 그 이면엔 유원식의 피눈물 나는 가족사가 있었다.

유원식은 항일독립운동기의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단주 유림(旦洲 柳林·1894∼1961) 선생의 외아들이었다. 아나키스트 그룹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그룹과 함께 일제하 항일독립투쟁의 3대 축이었다. 1902년 도쿄대에 있던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오늘날까지 그렇게 사용하고 있지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쓴 작가 이덕일은 “아나키즘을 그 어의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무정부주의보다 ‘자유연합주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회영과 단재 신채호가 바로 그 아나키스트 그룹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다. 유림을 아나키즘으로 이끈 사람도 신채호라는 설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타협을 몰랐다. 그렇지만 유원식은 “아버지를 감옥에서 내보내주겠다”는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일제 괴뢰 정부인 만주국 군대를 지원하고 만다. 만군(滿軍) 장교가 된 것이다.

유림은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아들을 보지 않았다. “만군 장교라면 어찌됐건 일제의 앞잡이노릇 한 것 아니었겠나?”

아들뿐 아니라 부인도 만나주지 않았다. 자식을 일제의 앞잡이로 잘못 훈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946년 부인이 별세했지만 유림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측근이 소식을 전했으나 유림은 들은 척도 않고 신문만 읽어내려 갔다고 한다.

딸도 사위가 이승만 정부의 경찰간부라고 해서 관계를 끊었다. 신채호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외교독립론’을 주창하던 이승만을 혐오했다.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 부자 화해를 위해 애썼지만, 유림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방황하던 유원식에게 “속죄의 뜻으로 해방 조국의 군에 입대하라”고 권유한 사람이 이시영이었다. 그래도 유림은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림이 환국 직후 창당한 독립노농당의 핵심간부이자 아나키즘 이론가였던 하기락 전 경북대 교수의 생시 증언. “6·25전쟁 초기 포항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치열하기로 유명합니다.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해야 했죠. 그때 연대장으로 이 전투에 참여하게 된 유원식은 마지막 한번만이라도 부친을 만나 보려고 대구로 왔어요. 마침 유림 선생은 우리 집 사랑방에 기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등을 돌리고 아들을 쳐다보지 않습디다. 아들은 끝내 부친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울며 그냥 돌아가고 말았지요.”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