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쇼와천황실록 ‘미화 논란’ 야스쿠니 참배 중단 이유 안밝혀 “A급전범 합사뒤 안간다고 말한 도미타 메모 인정한 셈” 분석도
실록은 총 61책 1만2000쪽으로 미공개 내부문서 등 3152건의 사료를 인용했다. 훗날 역사가들이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 당시 일왕의 역할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은 실록의 역사관과 사실관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일본 근대사 연구자는 도쿄신문에 “궁내청은 천황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개전과 전쟁 때 (천황의) 모습은 모두 수동형으로 기술하고 있고 종전에 이르는 과정은 천황이 주체적으로 말한 것으로 기술했다”고 비판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실록을 분석한 결과 히로히토 일왕이 전쟁을 전후해 군 간부와의 면담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일왕은 즉위한 뒤 1935년까지 군 간부, 정치가, 고위 관료 등 연간 200∼300명을 면담했으나 중일전쟁 발발 전년인 1936년부터 군인을 중심으로 면담이 늘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군 수뇌부가 연일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일왕을 방문해 1942년 군인 면담자는 450명을 넘었다. 일왕이 전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수치로 풀이될 수 있다.
실록은 패전 뒤 히로히토 일왕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중단 이유도 명쾌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실록은 1988년 4월 28일 기록에 “야스쿠니신사의 이른바 A급 전범 합사, (천황 자신의) 참배에 관해 말하다”라고 서술했다. 또 “2006년에는 ‘도미타 메모’라는 자료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라고 덧붙였다.
도미타 메모는 히로히토 일왕이 1988년 4월 도미타 도모히코(富田朝彦) 당시 궁내청 장관을 만났을 때 “어느 때 A급 전범이 합사됐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참배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마음이다”라고 발언했다고 기록한 메모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신문은 궁내청이 간접적으로 도미타 발언 내용을 추인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산케이신문은 궁내청이 도미타 메모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