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을 가며
―황규관(1968∼)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소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시집 ‘패배는 나의 힘’에서 옮겼다. 화자는 뼈 빠지게 일해도 월급은 참담할 지경인 직장을 다니며 ‘얼빠진 노동조합이나/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염증이 난 서울생활을 접고 시골로 훌훌 떠나왔다. 그런데 바뀐 환경에 차차 적응이 돼 과연 시골은 영혼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 데라고,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금빛 들판에서/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단다. 우선 ‘밥 때문에’. 시골에서는 생활비는 적게 들지만, 그 적은 생활비를 벌 방도가 도대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니까 그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을 몰라라 할 수가 없다. 물려줄 땅뙈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장차 시골에서 뭘 할 것인가. 화자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로 부친다. 호기롭게 떠나왔건만 이리 무릎을 꿇고 돌아가는구나.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고 무참한 심정으로 자복하는 화자다. 그런데 시인은 다른 시 ‘쇳소리’에서 ‘이제 나를 소모시키는 일 없이 사는 꿈을 버리마/바람에 부유할 먼지만 한 힘이 남아 있다면/소모가 곧 창조가 되는 바늘구멍만 한 길을/다시 처음부터 걷겠다’고 새로운 꿈을 제시한다. 시인이여, 그 노래를 들려주세요!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