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12·끝>실천하는 대한민국으로 왜 대형사고 후 바뀌는 게 없나… 액션플랜 만들자
2003년 2월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는 19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에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정치권은 앞다퉈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그 대책들은 그동안 제대로 실행됐을까.
대구시가 약속한 추모공원 건립은 2008년에야 이뤄졌다. 하지만 ‘추모’라는 단어를 빼고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모호한 이름을 내걸었다. 그 자리에 지하철 참사 희생자 일부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대구시의회가 결의했던 지하철의 정부 이관은 물거품이 됐다. 국가 재난안전통신망(재난망) 구축 역시 기억에서 잊혀졌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의 ‘복덕방 문화’를 비판한다. 복덕방에 모여 정치인 등 사회 권력자의 이름을 불러가며 성토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삼풍백화점 붕괴, 서해훼리호 침몰, 씨랜드 화재 등 대형 참사가 줄을 이었다. 대형 사고가 일어날 때면 정부는 항상 제대로 된 수습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대책이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됐다.
혁신안이 무위로 끝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거창한 거대담론만 제시할 뿐 구체적인 실행 계획(Action Plan)을 짜지 않는 것도 문제이고, 기득권층의 저항도 걸림돌이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정부와 공공 조직의 ‘구조화된 무능’이다.
최병권 상명대 교수(경영학)는 정부가 사고 수습을 위한 조직 구성의 기본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든 정부든 특정 사안의 해결은 구성원들의 역할 및 책임(R&R·Roles & Responsibility)을 규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전권을 가지고 일을 실행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세월호 참사 때도 정부는 컨트롤 타워가 없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관료주의로 대표되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조직문화도 개혁과 실행을 막는 걸림돌이다. 대표적인 게 순환보직 시스템이다. 고위 공무원이 한 업무를 맡는 기간은 짧으면 6개월, 길어야 3년이다. 장관이나 공공기관장 역시 수시로 바뀐다. 이런 상황에서는 리더들의 전문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 고위직을 순환보직자들이 차지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순환보직은 조직을 끊임없이 리셋(Reset)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사고가 터진 뒤 부랴부랴 정책을 내놓지만 담당자가 바뀌면 어느새 정책도 캐비닛 속에 묻혀버린다. 재난망 구축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추진됐지만 기술 방식,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계속 미뤄지다 세월호 사태 이후에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역사학자인 임용한 KJ&M 인문경영연구원 대표는 오랜 관료주의 전통이 탁상공론의 폐해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임 대표는 “서구와 달리 우리는 조선시대에 이미 치밀한 지방행정체계를 세웠는데, 이는 제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비전문가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조직 시스템은 구성원들이 내부정치나 단기 실적에 치중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사안은 ‘정치적’으로 결정되고 조직의 실행력도 떨어지게 된다. 김정수 베인앤컴퍼니 부사장은 “자신의 경력에 흠이 되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없으면 최대한 빨리 다른 분야로 옮겨야 한다는 분위기도 비전문가 양산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적게 먹고 운동하라는 조언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다이어트를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그 이유는 해결책은 맞지만 원인을 잘못 짚은 데 있다. 일의 특성상 야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운동할 시간이 없다. 이런 구조적인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짚은 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다이어트는 공염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조직행동 분야 학자인 제프리 페퍼 교수와 로버트 서튼 교수(미국 스탠퍼드대)는 함께 쓴 책 ‘생각의 속도로 실행하라(Knowing-Doing Gap)’에서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보다 ‘왜’를 먼저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뿌리를 찾아 제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어떤 사안에 대한 대책은 프로세스(Process)일 뿐이지 답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최 교수는 “여론에 못 이겨 내놓는 설익은 대책은 오히려 문제의 근본 원인 제거에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윤 일병 사망사고 이후 군부대에 공용 휴대전화를 지급하겠다는 대책이 군 가혹행위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다.
또 전문가들은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으면 반드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행 계획을 따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위기에 처한 GE를 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잭 웰치 전 회장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 큰 교훈을 준다. 웰치 회장은 현장 근무자들과 직접 만나는 ‘타운홀 미팅’을 도입했으며, 그들과의 회의가 회의로 끝나지 않도록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실행을 위한 후속 조치를 취하게 했다. 관리자들은 현장에서 올라온 제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고, 당장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문제를 해결할 팀을 지명하고 의사결정의 데드라인을 정해야 했다. 페퍼 교수와 서튼 교수는 이를 ‘대화를 행동으로 전환하는 모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노진철 경북대 교수(사회학)는 “미국은 9·11테러나 카트리나(허리케인) 사태 발생 때 20여 개월간 조사위원회를 꾸려 각계 의견을 들어 진상을 규명하고 제도를 보완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했다”며 “정부가 긴 안목을 갖고 일반 시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과정을 거쳐야 신뢰를 회복하는 동시에 정부 정책에도 힘을 실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창규 kyu@donga.com·이샘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