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수업 축소는 미래인재 육성에 역행한다 ▼
정진수 충북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학회협의체 교육과정대책위원
지식정보화시대인 21세기에 학생들은 기본적인 개념뿐 아니라 첨단지식의 변화도 어느 정도 알고 그 지식을 생활에 활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박제화된 지식만 남아 있다. 첨단 지식의 변화와 경중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배제하고, 소수의 교육학자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개정 작업을 맡겨온 결과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학생들이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제대로 학습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임무다. 교육과정을 수능 체제에 맞추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수능 체제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에 맞추어 교육과정의 틀을 정하겠다는 것은 ‘있지도 않은 꼬리(수능)’가 ‘몸통(교육과정)’을 흔드는 격이다.
인재상은 교육과정 문서가 이것으로 시작할 만큼 중요하다. 민주화 다원화 선진화된 사회에서 미래의 인재상을 설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사회 여러 분야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교육의 방향을 정하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방향도 정하지 않고 시간 배정부터 하겠다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땅부터 고르겠다고 덤비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의 교육내용은 학생들의 기초 소양을 충분히 길러주지 못한다. 일제가 교육비용을 절감하려고 만든 문·이과 구분 교육은 한쪽을 선택한 아이에게서 다른 반쪽의 학습권을 모두 빼앗는다. 선택권을 빌미로 지나치게 쪼개놓은 과목은 지식의 편식을 가중시킨다. 학생들이 들을 수 있는 과목의 무려 6배를 제공하는 현 교육과정에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과 배워두면 좋은 것이 마구 섞여 있다.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채,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라는 것을 맞춤형 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
최소한 가르쳐야 할 필수시간을 모든 과목에서 같이 줄이고, 진로에 따른 선택이 가능하도록 학교의 자율성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발상이다. 공식적 시간표도 지키지 않을 정도로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학교는 자율시간을 입시 과목에 쏟을 수밖에 없다.
미국은 과학 교육과정 하나만 만드는 데에도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 수백 명이 모여서 안을 만들고 수천 명의 검토를 거쳤다. 최근의 지식도 소개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역량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부는 미래를 위한 방향 설정도 없이 10명의 교육학자에게 반년 만에 틀을 정하라고 한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어른들의 ‘이해관계’가 학생의 미래를 좌우하게 놔둘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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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속한 기초과학학회협의체는 대한수학회, 한국물리학회, 대한 화학회, 한국 분자·세포생물학회, 한국지구과학학회 연합회가 모여 기초과학의 발전을 모색하는 단체다.
정진수 충북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학회협의체 교육과정대책위원
▼ 모든 과목 가르친다고 통합교육 되진 않는다 ▼
황규호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과정 개정 연구위원
그러나 문·이과 통합이 문과와 이과 등 계열을 폐지하고 모든 학생이 동일한 과목들을 똑같이 이수하는 획일적 교육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기초소양에 충실하되 자신의 진로에 따라 여러 과목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이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이과 통합교육의 기본 방향이다. 핵심은 ‘맞춤형 교육’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등학교 공통과목이나 교과별 필수 이수단위는 학생들의 진로에 따른 맞춤형 교육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과학계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과학 기초소양 함양을 위해서는 과학 교과 시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6단위를 배정했으니 과학에도 총 16단위(국어, 수학, 영어, 사회는 각 10단위)를 배정하라는 식이다. 또는 모든 교과에 15단위를 배정하되 도덕을 포함하는 사회교과군의 경우 이미 한국사에 6단위를 배정했기에 이를 차감한 9단위만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문·이과 ‘균형학습’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는 1970년대부터 공통필수 과목으로 지정돼 있었다. 한국사 필수 지정이 곧 과학교육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학생들에게 과학적 기초소양을 반드시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모든 학생을 위한 ‘기초소양’의 범위와 수준을 어느 정도로 규정해야 할 것인가이다.
지난번 교육과정 개정에서 일부 과학계 인사가 ‘최소한의 과학적 소양’이라며 제시한 내용에는 전문 과학자들조차도 생소해하는 현대과학 지식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과학교사들이 당황했음은 물론이요, 학생들 또한 난해한 용어들과 씨름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 과학지식의 기본 개념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의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의 이해수준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 셈이다. 세부적인 과학지식을 더 많이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한다는 개발자의 과도한 의욕과, 학교교육 및 학생에 대한 이해 부족이 낳은 결과다.
다른 한편으로, 기초소양 교육에서는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쳐야 한다”는 접근을 넘어서서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제 평가에서의 높은 시험 성적에도 불구하고 교과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왜 떨어지겠는가. 이 문제를 해소하려면 낱낱의 지식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교과별 핵심 원리와 탐구능력을 엄선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조직하여 사회 및 자연 현상에 대한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많은 지식을 얕게 가르치기보다 적은 내용을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전 세계 교육계가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경구다. 서울세계수학자대회에 참가했던 수학 천재들의 공통적인 조언도 더 많은 문제풀이보다는 기초 개념과 기본 원리의 이해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과 관련해 그동안 교과교육 전문가 및 학교 현장 교사들이 함께 참여하여 서로의 생각을 협의하고 조율해 왔다. 학습경험의 양보다 질을 개선하여 ‘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우는 교육과정이 될 수 있도록 학생과 학부모와 학교 선생님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모두가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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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입학처장과 교무처장, 한국교육과정학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구성 방안 연구’의 책임을 맡고 있다.
황규호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과정 개정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