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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돋보기로 들여다본 北 48년 외교술

입력 | 2014-09-13 03:00:00

◇북한의 벼랑 끝 외교사/미치시타 나루시게 지음/이원경 옮김/1420쪽·3만9000원·한울아카데미
南北美 충돌 비하인드 스토리




1968년 1월 23일 나포돼 대동강변에 전시 중인 미국 정보선 푸에블로호 (위 사진). 사건 직후 김용식 당시 유엔 대표부대사와 미국의 아서 골드 버그 유엔 대사가 만나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동아일보DB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은 박정희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적 영향을 줬다. 이 문제를 한층 악화시킨 것은 그의 과음이다.”

1968년 2월 미국 특사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사이러스 밴스가 귀국 직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밴스가 방한할 당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안보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해 1월 청와대 습격사건에 이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시국에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고민하기보다 우방국 대통령의 심리 상태를 살피기에 더 바빴다. 왜 그랬을까. 북한이 청와대까지 노렸다는 사실에 진노한 박정희는 즉각 보복을 원했지만 미국은 북한과의 무력충돌로 번질까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항공모함을 한반도 주변에 배치하고 예비군 1만4000명을 소집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런 미국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한국 정부는 배신감마저 품었다.

이 책은 도끼 만행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북한 핵 위기 등 북한의 ‘벼랑 끝’ 무력도발과 그에 따른 한미 양국의 미묘한 시각차를 잘 보여준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로 체제 경쟁 상대인 남한과 동북아 지역안보를 관리해야 하는 패권국 미국 사이에 균열을 유도했다.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 교수로 북한의 군사·외교 전략을 연구해온 저자는 한미 양국 정부의 문건과 탈북자 인터뷰를 토대로 1966∼2013년 북한 외교사를 정리했다.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군사전략과 맞물려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정책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국력이 남한에 비해 우위였던 1960년대에는 이른바 혁명투쟁과 미군 철수라는 공세적 성격을 띠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는 베트남전에 동원돼야 할 미군 전력을 동북아로 분산시켜 베트남 공산세력을 돕겠다는 김일성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붕괴된 1980, 90년대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은 체제 수호라는 방어적 목표로 조정된다. 1993, 94년 핵 위기 당시 북측이 일관되게 주장한 대미 관계 개선과 체제 보장, 경제적 보상 요구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벼랑 끝 외교는 시대에 따라 목표가 바뀌었지만 무력도발을 통한 한미 간 틈새 벌리기 같은 전술은 유지됐다. 예컨대 북한은 북방한계선(NLL) 수호 의지에 대한 한미 간 온도 차를 이용해 1970년대 내내 이곳을 분쟁 수역화한 데 이어 1993년 핵 위기 당시에는 남한을 따돌리고 북-미 간 직접 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93년 북-미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미국 정부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한미 관계를 단기간에 이간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적지 않은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예컨대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자주국방’ 노선은 한국의 방위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태 이후 한국에 1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벼랑 끝 전술이 북한에 이득을 가져오지는 못한 셈이다. 저자는 김정은도 김정일의 벼랑 끝 외교 전술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지만 과거의 사례에서 보듯 긍정적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