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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유리창 아이

입력 | 2014-09-15 03:00:00


유리창 아이
―정철훈(1959∼)

어느 해 가을 어머니는 고향집에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집이 낡았을 테니 가봤자 마음만 상하실 거라고 대꾸했지만
구정 연휴에 슬며시 찾아간 외가는
스러진 흙담에 담쟁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안채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선 것은
사랑채 먼지 낀 유리창에
내 어린 시절이 비쳐서였다

토방 그득한 아이들 가운데 내가 끼여 있고
한 계집아이가 유별나게 입술을 내밀고 있다
숯검댕이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달랑 간장 종지에 맨밥을 밀어 넣던 아이

주장집 외손이던 내가 방학이면 내려와 독상을 받을 때
그 아이는 막내를 포대기에 들쳐업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부엌 심부름을 하며 아궁이불을 지피던 아이
언 손등이 터져 핏물이 짓무르던
그 아이의 뺨을 갈긴 사연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냐고 외삼촌에게 묻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그 유리창 아이
그날 때린 뺨을 오늘에야 되돌려 받듯 얻어맞는다       
      

한 소년의 한 소녀에 대한 순정이 수채화처럼 그려진 황순원 단편 ‘소나기’가 대비돼 떠오른다. 이 시 속의 소녀는 폐가의 ‘사랑채 먼지 낀 유리창에’ 그 외롭고 가련한 모습을 드러낸다. 화자가 ‘주장집(양조장 집) 외손으로 방학이면 내려와 독상을 받을 때’ 소녀는 그 집 ‘부엌 심부름을 하며 아궁이불을 지피던 아이’였다. 그리 일을 한 대가가 ‘숯검댕이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달랑 간장 종지에 맨밥을 밀어넣던’ 것. 이웃어른도 참 냉혹하거나 무심했다. ‘토방 그득한 아이들 가운데’ 어린 권력이었을 화자는 그 천덕꾸러기 소녀의 뺨을 갈겼단다. ‘사연이 떠오르지 않는다’니 별 일도 아닌 일로. 입 하나 덜자고 어린 딸에게 남의 집 일을 시키고, 아기를 들쳐 업고 다니게 한 부모는 울타리가 돼 주지 못했을 테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소녀는 무섭고 서럽기만 했을 테다. 어쨌든 관심 밖이었던 소녀나 한 겨울방학의 유쾌하지 않은 에피소드나 화자의 기억에서 지워졌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장소에서 되살아난다. 거짓말을 했다거나 돈을 유용했다거나, 그런 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 자기의 비열함이나 폭력성으로 약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은 화인(火印)처럼 남는다. 때때로 그들은 돌아온다. ‘먼지 낀 유리창’에 그 모습을 비추어 사죄할 길 없는 가해자로 하여금 가슴을 움켜쥐게 한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