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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칼럼]교과목 권력 투쟁에 볼모잡힌 아이들

입력 | 2014-09-16 03:00:00


정성희 논설위원

2007년 김신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제7차 교육과정 개편은 (교사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권력투쟁”이라며 교육과정 개편작업의 어려움을 호소한 적이 있다. 현 교육비서관인 김재춘 영남대 교수는 당시 한 신문 기고를 통해 “교육과정 개정과 관련해 각 교과 전문가들에게 학생들이 해당 교과를 얼마나 공부하는 것이 적절한가를 조사했더니 적게는 현재보다 1.5배, 많게는 3∼4배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소개했다. 과목 수업시간을 늘리느냐 줄이느냐를 놓고 이해관계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권력투쟁 끝에 만들어진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이 전면 적용되기도 전에 개편되는 운명에 처했다. 노무현 정부의 교육과정이 이명박(MB) 정부의 교육방향과 맞지 않아서다. 학교의 다양화 자율화를 내세운 MB 정부는 중3까지만 국민공통 교육과정으로 하고 고교 전체를 선택과정으로 바꿨다. 자율형 사립고에 교과편성 자율권을 부여하고 특정 과목을 한 학기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집중이수제 도입을 골자로 한 2009 개정 교육과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효과를 보기도 전에 부작용부터 불렀다. 자사고는 늘어난 자율권을 국·영·수에 배정해 ‘입시학원화’했고, 자사고에 우수 학생을 뺏긴 일반고는 불만을 쏟아냈다. 집중이수제로 음악 체육 미술 등 예체능 과목을 한 학기에 몰아 하는 학교가 생기고, 학교마다 집중이수 시기가 달라 전학을 가면 특정 과목을 배우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MB 정부가 만든 2009 개정 교육과정은 박근혜 정부에서 슬그머니 수정됐다. “자사고만 국·영·수 과목을 늘릴 수 있게 해주느냐”는 일반고 항의에 교육부는 국·영·수·사회·과학 필수 수업이수단위를 15단위에서 10단위로 축소해 일반고의 교과목 편성 자율권을 늘려주었다. 미래를 이끌고 갈 창의 융합 인재를 배출한다는 건 현 정부의 구실일 뿐, 모든 교육과정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이념과 학부모 요구에 따라 조변석개(朝變夕改)를 거듭했다. 수시로 바뀌는 교육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영락없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였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는 단순히 과목 배치와 수업시수의 문제가 아니라, 장차 나라를 어떤 사람들이 끌고 가기를 바라는가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 나라마다 다른 교육과정과 수업단위에는 이런 한 나라의 고민과 철학이 담겨 있다. 예컨대 교육 강국 핀란드의 중학생들은 무려 19단위의 과학을 배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12단위다. 북유럽의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과학기술로 먹고살려는 핀란드의 국가적 의지가 느껴진다.

아일랜드는 읽고 쓰는 교육에 24단위(OECD 평균 16단위)를 배정하고 과학은 10단위뿐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배출한 나라답다. OECD 국가는 아니지만 수학 과학 교육에 집중하는 중국 교육과정도 주목된다. 비판적 사고 함양보다는 기초과학과 실용기술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체제의 특성 때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인 우주선을 쏠 수 있는 것이다.

국사 필수화와 문·이과 통합으로 인한 교육과정 개정작업이 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난번 교육과정 개정 때는 사회 교과에서 반발이 나왔는데 이번 문·이과 통합 과정에선 과학이 희생되고 있고, 개정작업이 ‘사대(師大) 마피아’에게 독점되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미래 인재상에 대한 국가적 합의를 이루지 않고 어떤 과목에 몇 단위를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는 것이야말로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격이다.

수업시수가 아니라 수업 내용에서 문·이과를 섞는 콘텐츠의 변화가 필요해 보이지만 더 급한 것은 미래의 인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교육과정 개정도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