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정의로운 분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맞서 왔다. 하나는 ‘역사적 원칙’이니,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을 재산에 대한 권리의 근본으로 삼는다. 다른 하나는 ‘최종 결과의 원칙’이니,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은 고려할 필요가 없고 분배가 최종적으로 평등하면 된다. 어느 쪽이 우리 천성에 맞고 논거가 튼실한가.
이 어려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시험 성적의 분배라는 유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역사적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험생들의 답안지들을 일일이 채점해서 성적을 매길 것이다. ‘최종 결과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험생들에게 모두 같은 점수를 줄 것이다. 시험 성적에 관한 한 대부분의 사람은 ‘역사적 원칙’을 따를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 원칙은 소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과 게으른 사람들이 같은 소득을 얻도록 강제하는 것을 정의라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사정이 그러하므로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기회의 평등을 뜻했다. 모두 법 앞에 평등하고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고 자기가 번 돈을 자기 재산으로 지닐 수 있다면 평등은 실현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18세기 말엽 프랑수아 에밀 바뵈프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결과의 평등을 주창했다. 소득의 불평등은 그것이 나오게 된 사정과 관계없이 부당하다는 얘기다.
기회의 평등이 평등의 본질이라는 점에 대해선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결과의 평등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큰 문제들을 품었다. 우리 천성에 어긋나므로,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려 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독재적 권력을 통해 자신의 뜻을 강요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결과의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없앤다는 점이다. 개인들의 노력을 살피지 않고 모두가 같은 소득을 올리도록 한다면, 스스로 일을 찾거나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회는 뜻이 없어진다. 중앙 정부가 할당한 양만큼 일하는 것만이 열린 길이다.
정부는 새는 물통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대부분의 사회는 기회의 평등을 기본으로 삼고 소득의 편차를 정부의 개입으로 줄이는 정책을 추구한다. 따라서 실제적 문제는 ‘소득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얼마나 깊숙이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이다.
미국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는 오아시스의 우화를 통해 이 문제를 살폈다. 김선달과 홍길동은 사막을 여행하다가 서로 다른 오아시스에 갇혔다. 김선달의 오아시스엔 물이 넉넉하지만 홍길동의 오아시스는 부족하다. 만일 비용 없이 물을 옮길 수 있다면, 정부는 그 두 오아시스의 물이 같도록 해서 전체 효용을 극대화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가진 것이 새는 물통뿐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정부가 김선달의 오아시스에서 홍길동의 오아시스로 물을 옮기려고 시도하면, 물의 상당 부분이 옮기는 사이에 사라진다. 이 경우 정부는 여러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홍길동이 얼마나 목이 마른가, 물통은 얼마나 많이 새는가 따위이다. 여기서 하나만은 분명하다. 새는 물통만을 가진 정부가 두 오아시스의 물을 똑같이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평등을 지향한 소득 재분배에서 정부가 적절한 수준을 찾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현재 미국 수준의 소득 재분배는 비교적 적은 비용을 치르고서 가난한 사람들을 크게 돕는다고 여긴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처지가 많이 다르지만, 소득 재분배 수준에선 대체로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소득 재분배를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하면, 혜택보다는 비용이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부자 때문에 가난하다고?
소득 문제의 핵심은 가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그들의 자식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상황이 문제다. 엄청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니다. 부자가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실은 부자가 많아야 투자가 되고 일자리가 늘어나서 가난한 사람들도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사치품을 누리는 것은 부자들이지만,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그래서 우리는 잘사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을 억제해야 한다. 우리의 천성이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를 판단하므로, 우리는 사회 위계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그렇게 할 정치적 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결국 사회는 응집력이 줄어들고 가난해진다.
소득 계층에서의 이동성
소득 분포는 계층 이동성(mobility)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득 계층에서 이동한다. 소득 분포는 스냅 사진과 같아서, 한 시점에서 사람들이 올린 소득의 편차를 보여줄 뿐, 사람들이 일생 동안 소득 계층에서 이동한 상황을 보여주지 못한다. 사람들이 소득 계층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살펴야 비로소 소득 불균형의 문제가 제대로 드러난다.
만일 상위 계층의 사람들이 늘 거기에만 머무르고 하위 계층의 사람들이 위 계층으로 이동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무척 심각할 터이다. 이동성이 커서 사람들이 많이 상위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다면, 사정은 많이 누그러진다.
사람의 평생 소득을 추적한 통계는 많지 않지만, 근년에 캐나다와 미국에서 나온 자료들은 이동성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하위 계층의 소득 증가율이 상위 계층보다 훨씬 높다. 반면에, 큰 돈을 버는 사람들도 인기가 시들거나 은퇴하면, 이내 아래 계층으로 떨어진다.
우리의 관찰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재벌들도 파산하고, 혼자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한 젊은 발명가들이 성큼 준(準)재벌 반열에 오른다. 극심한 가난으로 몰린 가구들도 있지만, 꾸준히 재산을 늘리는 가구가 훨씬 많다. 이처럼 소득의 편차는 점점 커지지만, 활발한 이동성은 그런 편차의 문제를 누그러뜨린다. 시장경제가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을 보다 알차게 한다면, 소득 양극화는 우리 체제를 위협할 만큼 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도력의 일반적 특질, 현대사회가 응집력을 확보하는 방안인 상호적 이타주의, 그리고 상호적 이타주의가 가장 활발히 발휘되는 시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선 이 시리즈의 목표인 ‘대한민국에 필요한 지도력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