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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상수]감정노동자로 산다는 건

입력 | 2014-09-19 03:00:00


김상수 사회부 차장

‘롤러코스터’라는 한국영화가 있다. 지난해 개봉한 6억 원짜리 저예산 영화로 배우 하정우의 감독 데뷔작이다.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을 담은 이 영화에는 여성 승무원을 괴롭히는 ‘진상 승객’들이 등장한다.

영화 ‘육두문자맨’으로 한류스타가 된 바람둥이 마준규(정경호 분)는 마음에 드는 승무원에게 끊임없이 명함을 달라고 요구한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은 한 승객은 비행기가 출발하기도 전에 “배가 고프다”며 식사를 달라고 요구한다. 승무원들은 커튼 뒤에서 ‘진상 승객’에 대한 스트레스를 거하게 욕으로 푼다.

승무원은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감정노동을 많이 하는 10개 직업을 조사했더니 항공기 승무원이 1위였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앨리 러셀 혹실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가 1983년 ‘관리된 심장(The Managed Heart)’이라는 저서를 통해 처음 보급한 용어다.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대인 서비스업 종사자가 감정노동자다. 다수의 고객에게 친절과 상냥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야 하는 승무원, 백화점 판매원, 콜센터 직원, 골프장 캐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냐’라는 노래 가사처럼 감정노동자들은 고객을 응대하면서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우울한 상태가 이어지는 ‘스마일마스크 증후군’을 겪는다.

감정노동자 가운데 특히 승무원과 캐디의 스트레스는 다른 직업군보다 심한 편이다. 재수가 없으면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진상 고객’과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적인 농담이나 행동에 노출될 위험성도 높다.

백화점 판매원도 고객 스트레스가 심한 감정노동자다. 국내 백화점들은 입점업체에 고객 서비스 지침을 내린다. 한 백화점 서비스 매뉴얼을 입수해 봤더니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

기본 강령은 ‘주차장에 입점하는 순간부터 퇴점할 때까지 모든 사원이 (고객과) 눈만 마주치면 인사한다’로 돼 있다. ‘3불(不) 서비스’라는 것도 있다. 직원이 고객에게 하면 안 되는 말 3가지로 ‘없어요, 안돼요, 몰라요’다. 없어요는 ‘고객님 죄송합니다. 그 상품은 인기상품으로 품절되었습니다’로, 안돼요는 ‘고객님 해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로, 몰라요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로 바꿔서 말해야 한다.

안전보건공단은 감정노동자 수를 국내 임금근로자 1770만 명 중 560만∼740만 명으로 추정한다. 전체 근로자 10명 중 3명꼴이다. 이 중 절반가량이 여성이다. 지난해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과 노동환경연구소의 ‘감정노동종사자 건강실태조사’(남녀 2268명 설문)에 따르면 여성 감정노동자의 48.9%가 ‘우울증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30.6%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고, 4%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 고객으로부터의 피해 사실을 왜 알리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회사가 별 대책을 세워주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응답이 82.6%였다. ‘과잉 친절’만 요구하고 직원의 힐링(치유)에는 관심이 없는 기업들도 문제의 근원지다.

자 어떤가. 이런 충격적인 실태를 보고도 ‘고객은 왕’이며 ‘난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문화를 만들 때가 됐다. 그런 면에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려준 캐디 분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김상수 사회부 차장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