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이준규(1970∼ )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나무에 앉아 있다. 그것은 파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그럴듯하게 가고 있다. 그것은 책상 앞에 앉아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을 빼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건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지하철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것은 개수대 앞에 서서 커피가 담긴 잔을 작은 숟가락으로 그럴듯하게 젓고 있다. 그것은 젓가락으로 참치 회를 집어 입으로 그럴듯하게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절 앞에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무덤 앞에서 오열한다. 그것은 북극에서 남극으로 그럴듯하게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머리를 긁으며 그럴듯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것은 진심이 담긴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럴듯하게 낙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꼬았던 다리를 몇 번 바꾸며 그럴듯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병상에 누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관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의심 없는 책장을 그럴듯하게 넘기고 있다. 그것은 묵묵히 그럴듯하게 수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성기를 성기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