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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야

입력 | 2014-09-22 03:00:00

한산 이씨 인재공파 이선호 종부





이윤화 (레스토랑가이드 다이어리알 대표)

종가 음식 취재를 위해 종갓집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몇백 년 된 고택에 살고 있는 종부(宗婦)의 대물림 음식을 취재하는 것이니 발굴 자체부터 만만치 않았다. 설사 그런 종가를 찾았다 하더라도 집 안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어렵사리 취재를 허락받고도 종택 대문을 들어설 때면 늘 긴장되곤 했다. 거기에 역사에 해박한 종손이라도 만난다면 그날은 머리에 ‘쥐나는’ 날이다.

불천위(不遷位·업적이 뛰어나 영구히 제사를 모시도록 국가가 지정한 인물)를 몇 분 모시는지부터 입향조(入鄕祖·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상)를 언급하며 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면, 마치 단군신화의 원형을 공부하던 대학 1학년 교양국사 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종손의 어려운 말씀이 끝나면 비로소 종부의 음식철학을 들을 수 있다.

종부들을 만나면서 맞장구 요령을 나름 터득했다. 일단 종가의 고된 시집살이와 한 해 수십 번 있는 제사 준비의 어려움을 정성껏 귀담아 들어야 한다. 특히 연애결혼한 종부에게서 결혼과 동시에 인생의 환상이 깨졌다, 결혼을 결사반대하던 친정엄마가 이제야 이해된다는 등의 얘기에 공감하고 나면 같은 여자로서 끈끈한 느낌마저 오간다. 그런 뒤에는 집안 음식의 노하우라도 다 내줄 것 같은 분위기에 이른다.

몇 해 전 경기 고양시의 한산 이씨((韓山 李氏) 인재공파(麟齋公派) 종가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이선호 종부는 집안의 대소사로 평생을 보낸 후덕한 분이셨다. 이 집안에는 유독 옛 맛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집안 내림 술이었다. 종부는 술을 잘 빚을뿐더러 애주가 남편(종손)의 건강을 위해서 음주 후에는 헛개나무 달인 물을 늘 챙겨줬다.

한 번은 종부가 머리를 썼다. 번번이 술을 마시고 취한 뒤 헛개나무 달인 물을 마시느니, 술을 담글 때부터 헛개나무를 넣는다면 해독 또한 저절로 되는 술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예 헛개나무를 넣어 술을 담근 것이다.

드디어 제삿날이 돌아왔다. 짜잔∼ 하고 열어본 술독의 술!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평소 술을 잘 담근다고 칭송을 듣던 종부의 술이 맹탕 아니던가. 제사를 목전에 둔 시간이라 종손의 불호령은 떨어지고 정말 난감했단다. 해독 음료는 술을 마신 뒤에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데 단계를 합쳐 버리니 술도, 헛개나무 달인 물도 모두 제 역할을 못 했다는 것이다.

웃으며 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종부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평소 음식 개발 프로젝트를 하면서 시간을 조금 줄여보려고 팀원들에게 기획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서 완성도 낮은 음식상품이 나오거나 콘셉트가 딱 떨어지지 않아,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던 일이 여러 번 있지 않았던가!

세상만사 꼭 밟아야 되는 단계가 바로 순리(順理)라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이윤화 (레스토랑가이드 다이어리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