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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로 본 AG] 인어·신궁·인간탄환들이 자웅을 겨뤘던 1986년 서울

입력 | 2014-09-23 06:40:00

1. 한국에서 열린 첫 국제종합스포츠대회인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은 온 국민에게 많은 추억과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선수단이 역사적인 개회식에서 남자역도의 이민우를 기수로 위풍당당하게 입장하고 있다. 2.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는 수영 여자 배영 100m와 200m를 제패했다. 3. 양궁 4관왕을 달성한 양창훈(가운데), 3관왕 박정아(왼쪽), 신궁 김진호. 4. 장재근(왼쪽)은 남자 200m 2연패로 ‘육상의 전설’이 됐다. 스포츠동아DB


■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의 추억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뭇남성들의 연인으로
양창훈 양궁 4관왕·장재근 200m 2연패 ‘전설’
마지막 날까지 애국가…한국, 종합 2위 마무리

한국전쟁 폐허 딛고 일어선 ‘한강의 기적’ 투영
육상 3관왕 임춘애, 1986년 서울 최고 스타로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에 유람선이 흐른다’는 가수 정수라의 노래가 대한민국을 메아리치던 1986년 가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잡은 정권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국제스포츠에 매진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했다. 두 대회의 성공적 완수는 국가적 목표였다.

‘86-88’은 모든 어려운 일을 다 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였다.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을 우려해 목동 지역의 판자촌을 철거했다. 서울시내의 보신탕집은 외국인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를 들어 뒷골목으로 내쫓던 때였다. 서울 강남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200만원이었고, 집값은 2년째 하락하던 시기였다. 1월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했다. 4월에는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전교조 탄생 등 사회 곳곳에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여기저기서 정권과 파열음을 빚었지만, 아시안게임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단군 이래 대한민국이 개최하는 최초의 종합스포츠대회라 국민적 기대도 컸다. 9월 14일 김포공항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사망하는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아시안게임의 개막을 방해하려는 북한이 사주한 아랍계 테러리스트의 범행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9월 20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아시아 27개국 4839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월 5일까지 대회는 성공적으로 펼쳐졌다. 역대 아시안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북한은 참가를 거부했다. 라오스, 몽골, 베트남, 남예멘, 시리아, 캄보디아는 북한에 동조했다. 미얀마(재정문제), 브루나이(국왕 서거), 아프가니스탄(소련 침공) 등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불참했다.

● 대회 유치 과정과 새로 추가된 종목은?

1981년 11월 26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전신 아시아경기연맹(AGF)은 대회유치 경쟁을 벌이던 이라크 바그다드와 북한 평양이 중도포기해 대한민국 서울이 제10회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만장일치를 통해 선정됐다고 밝혔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19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터라, 아시안게임 유치전도 서울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먼저 대회 유치를 포기했고, 북한도 뒤따랐다. 북한은 당시 평양에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15만명이 들어간다는 능라도경기장을 건설했다.

한국이 종주국인 태권도와 유도, 여자사이클, 여자사격 등 4개 종목이 아시안게임에 처음 등장했다. 한국은 태권도에서 전 체급 금메달을 자신했다. 대회 마스코트는 ‘호돌이’였다. 1988서울올림픽에 등장했던 그 호돌이가 아닌, 배다른 호돌이였다.

● 대회 진행은?

1988서울올림픽에 대비한 시뮬레이션 성격으로 대회가 진행됐다. 정부는 대기업 총수들에게 스포츠 종목을 하나씩 맡겼다. 회장으로서 책임지고 해당종목의 경쟁력을 높이라고 주문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금메달은 총수의 능력이자, 기업의 자존심으로 직결됐다. 막대한 투자가 이뤄졌고, 그것도 안 되면 편법이 동원됐다. 그 결과 판정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대표적 종목이 복싱이었다. 한국복싱은 서울아시안게임 12체급 전부를 석권했다. 복싱을 담당했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이 반영된 결과였다. 유도에서도 금메달 8개 가운데 6개를 한국이 휩쓸었다. 일본은 2개에 그쳤다. 태권도는 8체급 싹쓸이를 자신했으나, 7개에 그쳤다.

축구는 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게임 사상 3번째 금메달이었다. 대회 마지막 날 메인스타디움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가장 바라던 마무리였다. 한국은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로 종합 2위에 올랐다. 1위 중국은 금메달 94개, 은메달 82개, 동메달 46개였다. 메달 합계에선 한국(224개)이 중국(222개)을 제쳤다. 개최국 한국과 아시아의 슈퍼파워로 급부상한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금메달 58개, 은메달 76개, 동메달 77개에 그친 일본은 아시안게임 사상 최초로 3위로 밀려났다.

● 대회를 빛낸 스타는?

인도의 여자육상스타 PT 우샤는 100m, 200m, 400m, 400m 허들, 400m 계주, 1600m 계주에 출전해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일본의 무로후시 시게노부는 아시안게임 남자투포환 5연패를 달성했다. 그 아들 고지는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같은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 부자(父子)가 한 종목에서 무려 7번 우승을 차지했다.

양궁의 양창훈은 남자단체전, 70m 더블, 50m 더블, 30m 더블에서 금메달을 따내 4관왕에 올랐다. 수영의 최윤희는 1982년 뉴델리대회 배영 100·200m와 개인혼영 2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1986년 서울대회에서도 배영 100·2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쥐며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이 사랑하는 연인이 됐다. 육상의 장재근도 1982년 대회에 이어 남자 200m에서 연속 우승하며 ‘아시아의 탄환’으로 인정받았다.

우리 국민에게 가장 감동을 준 선수는 여자육상의 임춘애였다. 아시안게임 4개월 전 벌어진 전국체전에서 1500·3000·1만m 3관왕에 오르면서 국가대표가 됐다. 주 종목이 아닌 여자 800m에서 인도의 쿠리신칼 아브라힘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코트 이탈로 실격되면서 임춘애에게 금메달이 돌아갔다. 1500m에선 중국의 양유하에게 뒤지다가 막판에 역전극을 펼쳤다. 다음날 3000m까지 우승해 1986아시안게임을 상징하는 선수가 됐다.

당시 우리 국민은 가난 속에서 역경을 겪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성공한 임춘애에게 우리의 모습을 투영했다. 6·25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이처럼 큰 국제대회를 무리 없이 치러낸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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