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평남 온천비행장에서 명예의장대를 사열하는 김정은 부부.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북한에서 서울로 전파를 타고 날아온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곧 병역제도를 개편해 여성도 의무적으로 7년을 군 복무하며, 남성의 복무기간도 1년 더 늘린 11년이 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북한 군 입대 연령이 17세임을 감안하면 남성은 28세까지, 여성은 24세까지 군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혀 오는 숫자였다. 남쪽에서 태어났으면 손잡고 대학가를 누빌 푸릇푸릇한 청춘들이 잘못 태어난 죄로 황량한 먼지 흩날리는 산골짜기마다에 젊음을 매장당할 터이다. 전쟁이라도 나면 남남북녀가 총구를 맞대고 서로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져야 한단 말인가.
소식을 접하자마자 반년 전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가 부과되어야 한다’는 헌법소원에 ‘여성은 전투에 적합지 않은 신체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 한국의 헌법재판소 판결이 떠올랐다. 2014년 한핏줄인 남과 북의 여성은 너무나 극명히 대비되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새 군 복무제도가 발표되면 민심이 요동칠 것 같은데요.”
기자의 말에 소식통은 “당연하다. 제발 김정은을 좀 타일러(?) 달라”고 외쳤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북한에선 아첨꾼들에게 막혀 김정은에게 민심이 전달될 가능성이 없으니 혹시 한국 신문에 나면 김정은이 보지 않을까 싶은 기대에서 나온 호소였다.
“아니 자기는 일찍 장가가 애를 낳고선 우리는 못 가게 하다니.”
김정은은 25세 때 20세였던 이설주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주민 대부분은 김정은과 이설주가 정확히 몇 살 때 결혼했는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어떻든 곧 여성 의무병역제와 군복무 연장 법안이 발표되면 이번엔 병사들, 나아가 전체 인민이 분노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28세와 24세까지 군 복무를 하면 자연스럽게 온 나라의 결혼연령이 높아지게 된다. 북한은 남성 결혼 적령기를 27세, 여성은 24세 정도로 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결혼이 아니다. 남성들에게는 배고픔을 더 견뎌야 한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여기에 갑자기 7년을 군에 가야 하는 여성의 공포는 설명조차 필요 없다.
군 보위부에 비밀리에 하달된 동향감시 기준에 따르면 북한의 관심병사 분류의 맨 첫 번째 기준은 ‘먹는 데 신경을 쓰는 병사’다. 다음으로 전과자, 탈영자, 상하 간 불화를 만드는 자, 성격 난폭자, 장래를 고민하는 자, 사회에서 안 좋은 물을 먹고 입대한 자, 병을 고민하는 자, 정치적 문제가 있는 자 순이다.
먹는 데 신경 쓰는 병사가 1순위인 이유는 구타 탈영 등 크고 작은 사고 대부분이 먹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노크 귀순’한 북한 병사의 목숨 건 탈북의 발단도 배고파 밥을 훔쳐 먹다 상관에게 들켜 구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바야흐로 젊은 여성들이 밥을 훔쳐 먹다 매를 맞아야 하는 시대가 오게 될 판이다.
북한 매체는 김정은이 군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정신력을 강조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군이 처한 현실적 첫째 과제는 정신력이 아니라 먹는 문제 해결이다. 군 지휘관들이 최근 회의에서 가장 많이 하달받는 총정치국 지시도 “감자 농사 잘 지으라. 콩 재배법을 숙지하라. 농촌지원 성적을 평가에 반영하겠다” 등등의 것이다. 우수 군 지휘관을 평가하는 첫째 잣대도 물자 조달을 잘하느냐이다. 이쯤 되면 북한군이 협동농장인지, 지휘관이 자재인수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북한군 식량 사정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만약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군 복무를 기꺼이 감수할까.
하지만 배부르면 또 딴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요즘 아이들은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충성심도 없습니다. 이제 모든 젊은 남녀를 군에 몰아넣으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 겁니다. 김정은에게 남아 있던 한 조각의 미련마저 사라지고 그를 아마 악마처럼 생각할 겁니다. 이런 목소리가 김정은에게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소식통의 희망대로 김정은이 민심을 안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그럴 것 같진 않다. 김정은 입장에선 “군대가 줄면 체제도 위태롭다. 여자 군인으로라도 전국을 덮어야 한다”는 핵심 기득권의 주장이 더 솔깃할 것 같다. 여군 몇십만 명과 민심. 어느 쪽이 김정은의 생존에 더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엔 역사가 대답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