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타이푸드레시피닷컴
정동현 셰프
비행기는 런던에 내린 눈으로 연착을 했고 나는 항공사가 마련해준 호텔에 갔다. 한밤중에 열린 뷔페, 밤공기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동남아 특유의 들뜬 열기와 은은한 풀 비린내가 느껴졌다.
그 몸으로 나는 살고 봐야겠다 싶어 접시에 음식을 퍼 담았다. 평소엔 없어 못 먹던 고기보다 무채같이 생긴 샐러드가 눈에 띄었다. 향긋했고 시큼했다. 왠지 모르게 기운도 나는 것 같았다. 그때가 첫 경험이었다. 그 시고 달고 매운, 솜땀(somtam)을 만난 것은.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1993년)에서 솜땀은 중요한 소재다. 전쟁 발발 전 평화로운 베트남이 배경인 이 영화는 식모살이하는 소녀 ‘무이’의 인생을 그렸다.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전래 동화와 달리 좋은 주인을 만난 무이는 짝사랑하는 주인집의 아들 친구를 위해 그린 파파야로 샐러드를 만들어낸다. 그린 파파야는 그 ‘좋았던 시절’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여기서 잠깐, ‘그린 파파야 향기’는 베트남 영화인데 왜 솜땀을 태국 샐러드라고 하냐고 따질 만도 하다. 솜땀은 태국 근처 즉 라오스, 베트남에서도 먹는다. 굳이 원조를 따지자면 라오스로 지역마다 이름이 다르다.
어쨌든 파파야는 과일보다는 채소에 가깝다. 풋사과처럼 아삭거리고 무처럼 시큼하며 오이처럼 맹숭맹숭하다. 덜 익은 것들이 그렇듯 과육은 조밀하여 쉽게 무르지 않는다. 파파야 먹는 방법은 영화 주인공 무이가 잘 보여준다. 껍질을 벗긴 파파야에 세로로 긴 줄을 새기듯 칼로 파파야를 툭툭 치고 위에서 밑으로 얇게 대패 미는 것처럼 칼질한다. 그러면 국숫발 같은 채가 나오는데 이걸 쓴다.
솜땀에 들어가는 건 파파야뿐이 아니다. 오이 당근은 기본이고 토마토 적양파 땅콩은 옵션이다. 단 동남아 허브들이 빠지면 안 된다. 특히 고수는 무조건이다. 한국 사람 중 특유의 향 때문에 싫어하는 이가 많지만 고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널리 쓰이는 허브이며 재배 역사도 제일 길다. 게다가 뿌리부터 씨까지 버릴 게 없다.
이 소스는 서양 드레싱보다 훨씬 강하다. 눈알이 튀어나오게 매우면서 감칠맛이 나 입에 착착 감긴다.
쉽게 지치고 늘어지는 그쪽 날씨에 솜땀은 필연적이고, 숙명적이다. 어중간한 맛으로는 그 더위를 물리칠 수 없을 테니까.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쫘악 정신을 차리게 하고, 멀리 도망간 입맛을 잡아와, 입은 즐겁고 위장은 활기차진다.
스물아홉 그해 겨울, 불안한 설렘 속에서 나는 솜땀을 입에 넣었다. 한국을 떠나는 것이 이리도 힘든가, 내일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런 상념은 이내 솜땀의 강렬한 맛에 사라졌다.
이국의 밤, 낯선 음식은 내 고뇌를 가라앉혔고 내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음식의 힘이었다. 그 힘을 알아내려 나는 먼 길을 돌아갔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2)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