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사용후핵연료 처리장 30년 준비… “지하 437m 암반서 영구처분”

입력 | 2014-09-24 03:00:00

[원전 선진국 핀란드에서 배운다]




핀란드 올킬루오토 섬에 건설 중인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 연구시설 ‘온칼로’의 모습. 깊이 437m 지하에 마련된 지름 1.5m의 구덩이 안에 캐니스터로 감싼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한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제공


“정부 규제기관과 발전회사는 원자력발전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 주민은 이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굳게 신뢰합니다.”

인구 6000명의 핀란드 소도시 에우라요키에서 17일 만난 하리 히티외 시장은 “원자력 에너지를 우리 지역에서 다룬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36년간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됐지만 안전성에 문제가 없었고 전 세계가 핀란드 원전의 투명한 관리를 믿고 있다”며 정부와 발전사에 강한 믿음을 내비쳤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에우라요키의 올킬루오토 원전단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전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및 최종 처분 지하연구시설 등이 한꺼번에 들어선 곳이다.

핀란드는 치밀한 안전관리와 투명한 정보공개를 통해 얻은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30여 년 전에 수립한 방사성폐기물 관리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있다. 핀란드와 같은 해에 원전 가동을 시작했으면서도 사용후핵연료 정책을 마련하지 못한 한국과 크게 대비된다.

○ 최소 1만 년 이상 격리 처분하는 사용후핵연료

핀란드의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 연구시설 ‘온칼로’는 올킬루오토 섬의 암반을 지하 437m 깊이로 뚫어 2004년부터 건립 중이다. 지상에서 차를 타고 경사 9.6도의 가파른 지하터널을 5km가량 달린 끝에야 바닥에 도달했다. 지하에는 지름 1.5m 크기의 큼직한 원형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하는 실험이 이뤄진다. 핀란드는 여기서 얻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 지역에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을 건설해 2022년부터 100년 이상 최종 처분에 나설 계획이다.

영구처분장에 묻히는 사용후핵연료는 최소 1만 년 이상 격리된다. 임시저장시설과 중간저장시설에서 수십 년간 열을 식히고 방사능을 줄여 높이 8m, 무게 30t의 거대한 캐니스터(금속 밀봉용기)에 담아 매립한다. 핀란드는 원전 상업가동을 개시한 1978년에 사용후핵연료 처리 타당성 조사를 시작했다. 1983년 착수한 지질조사와 안전성 평가, 해당 지자체 투표 및 국회 인준 등을 거쳐 2004년 마침내 연구시설의 첫 삽을 떴다. 이에 비해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중간저장시설만 가동할 뿐 최종처분장 건립은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중간저장시설은 핀란드에서 이미 1987년부터 가동 중이다. 원전 바로 옆에 40년 동안 1270t의 사용후핵연료를 수조 안에 저장할 수 있도록 했다. 원전 운영사인 TVO사는 2010년에 중간저장시설 용량을 2배로 늘리기로 하고 지난해 공사를 마무리했다.

○ 투명한 정보공개, 지속적 대화로 신뢰 확보

핀란드라고 사용후핵연료 처리 정책을 처음부터 매끄럽게 추진한 것은 아니다. 현지 리서치업체 IRO에 따르면 1983년에 실시한 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14%만 ‘국내에서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게 안전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실제로 핀란드는 1980년대까지 사용후핵연료 일부를 소련에 위탁해 처분했다.

핀란드 정부는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정면 돌파에 나섰다.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도 강화했다. 현지 정부 규제기관인 방사능원자력안전청(STUK)의 리스토 팔테마 핵폐기물 규제담당관은 “부지 조사 내용 등 처분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공개하고 원전 지역 주민과 최소 1년에 한 번 이상 공개토론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좋았다. 에우라요키 의회는 2000년 76%(찬성 20, 반대 7)의 찬성으로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장 건설을 받아들였다. 베사 얄로넨 에우라요키 의회 의장은 “정부와 발전사가 투명하게 정보를 제공해 주민들이 높은 신뢰감을 보냈다”며 “지역고용을 창출하고 재정을 살찌우는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야나 아볼라티 핀란드 고용경제부 수석고문은 “정부가 강력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가는 원칙을 강조했다”며 “전문가의 정확한 정보와 지자체, 의회의 적극적 참여가 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의 성공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 : 사용후핵연료 : :

원자력발전소에서 연료로 사용된 뒤 폐기물로 나오는 우라늄 연료 다발. 강한 방사선과 높은 열을 내뿜는 위험물질이기 때문에 특수기술을 이용해 지하 수백 m 깊이에서 안전하게 처분해야 한다.

▼ 세계5위 원전大國 한국, 핵연료 처리시설은 ‘0’ ▼

수조에 임시 저장… 2년뒤부터 포화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원자력발전소를 많이 운용하고 있지만 사용후핵연료 처리 시설은 한 곳도 보유하지 않고 있다.

1978년 고리원전 1호기를 시작으로 원전 23기를 건립해 운영하고 있지만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수조 등)에 사용후핵연료를 넣어두는 것 말고는 뚜렷한 관리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현 추세대로라면 2016년부터 임시저장시설이 순차적으로 포화될 예정이라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를 놓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지난해에 학계, 원자력계, 시민단체 등 각계 대표 13명이 참여한 공론화위를 출범시켰다. 공론화위는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한 의견을 모아 정부에 정책 방향을 권고하고, 정부는 이를 토대로 사용후핵연료 정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계획대로라면 2015년 이후 중간저장시설 용지 선정이 이뤄진다.

홍두승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장(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은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관리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늦출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며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 신뢰를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 선진국은 어떻게 하나 ▼

美, 원전 중간저장시설에 보관… 佛, 노르망디서 폐기물 재처리


원자력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선진국들은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원전 100기를 가동하고 있는 미국은 전국에 산재한 주요 원전 부지 내에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1년 말 기준 누적 발생량 6만7600t 가운데 74%는 습식시설(수조)에, 나머지는 콘크리트용기 등 건식시설에 저장 중이다. 미국 정부는 1987년 네바다 주 유카 산을 최종처분 용지로 선정했으나, 지역민의 반발이 거세 2009년 백지화한 뒤 대안을 모색 중이다.

프랑스는 노르망디 지역에서 ‘라 아그’라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을 운영한다. 자국 내 폐기물은 물론이고 독일, 일본 등 전 세계에서 들여온 사용후핵연료도 재처리한다. 한국은 한미원자력협정과 기술·경제적 문제 등으로 재처리가 불가능하다. 스웨덴은 남부 오스카르스하믄의 중간저장시설 ‘CLAB’에 쌓아두고 있는 사용후핵연료를 향후 최종처분할 계획이다.

에우라요키·헬싱키=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