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은 작고 힘은 모자라… 믿을 건 땀밖에 없었죠”
○ 잊을 수 없는 아시아경기의 추억
이형택은 이번 개회식에서 때 아닌 유명세를 치렀다. 그는 JYJ가 대회 주제가를 부르던 5분 가까이 성화봉을 들고 있다 최종 점화자인 이영애에게 건네줬다. 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이었다. “TV에 내 얼굴이 꽤 오래 클로즈업된 모양이다. 다음 날 전화기에 불이 났다(웃음).” 이 행사는 이영애의 등장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이형택은 “그 하루 전날 최종 리허설에서 이영애 씨 얘기를 들었다. 이 씨가 혼자 성화에 불을 붙이려다 그 사실이 미리 새어나가 어린 선수 두 명이 급조됐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 원래 시나리오에도 그리 돼 있었다. 어린이가 우리의 미래라는 걸 보여주는 의미였다”고 털어놓았다.
○ 가위바위보가 바꾼 삶
강원 횡성의 산골마을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이형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테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일을 하려고 서울로 떠났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막둥이였던 그에게 라켓은 고단한 삶을 잊게 해주는 벗이자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었다. “원래 축구 선수로 뽑혔는데 형들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테니스로 바뀌었다. 공을 잘 튀기고 운동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밥과 김치뿐인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도 운동에 매달렸다. 테니스부에서는 건빵이나 과자도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객지 생활을 했다. 원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고교는 춘천(봉의고)으로 갔다. “중학교 때 양구에서 합숙 훈련을 하는데 밤마다 엄마 생각이 나 울다 지쳐 잔 적도 많다. 그러면서 마음이 단단해졌다.” 해외에 나가면 왜소한 축에 드는 그는 “나는 엄청난 파워를 지니지 못했고 시속 220km짜리 서브를 넣는 것도 아니다.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상대보다 더 많이 뛰고 빨리 쳐야 했다”고 말했다. 근력과 스피드를 키우려면 땀밖에 없었다. 이형택은 해외 대회에 나갈 때면 손가방 안에 항상 아령과 고무 밴드를 갖고 다니며 비행기나 호텔에서도 쉼 없이 근육을 키웠다. 엄동설한에 물을 뺀 수영장에서 공을 친 것은 유명한 얘기다.
○ 누군가 나를 넘어설 그날을 위해
이형택은 2010년 춘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테니스 아카데미를 열었다. “선수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 외국은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후배들의 도전 정신도 줄었다. 국내에서만 뛰어도 먹고살 만하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힘들어도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이형택에게는 두 명의 잊을 수 없는 지도자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은사 이종훈 교사와 삼성증권 시절 주원홍 감독(현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이다. “내 스타일과 나를 이해해 준 스승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어려서부터 승패에 연연해 꾸짖기보다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치면 칭찬을 해주셨다. 장래를 보고 지도해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2009년 은퇴한 이형택은 지난해 선수로 복귀했다. 코트에 대한 미련이 남기도 했지만 자신을 뛰어넘을 후계자가 없는 답답한 현실도 영향을 미쳤다. 어린 선수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그들의 성장을 돕고 싶다는 포부도 있다. 이번 아시아경기에도 대표로 뽑혔지만 가슴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 갈비뼈 하나를 7cm 제거하면서 포기했다. “복식 위주로 하다 보니 충분히 할 만하다. 그랜드슬램 대회도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아직도 코트에 있을 때가 행복하다.” 2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형택과 작별의 악수를 했다. 마주 잡은 오른손 손가락 마디마다 콩알 크기의 딱딱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인천에서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