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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칼럼]재난보도준칙, 전장에 서다

입력 | 2014-09-29 03:00:00

세월호 참사 보도는 한국 언론에는 버거웠던 전장… 부끄러운 민낯 그대로 드러내
재난보도준칙 갖고 다시 전장에
숨 좀 돌렸다고 준칙 무시하면 제2의 반성문도, 제2의 처방도 소용없다




심규선 대기자

매스컴이 ‘치열하다’는 뜻으로 ‘전쟁’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쓴다는 꾸지람을 들어 온 지 오래다. 그래도 잘 바뀌질 않는다. 기자 본인들이 매일 ‘취재전쟁’을 하고 있어서일까. 기자들이 전쟁을 한다면 그들이 가는 곳이 모두 전장이다. 재난현장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한국 언론은 이번에 세월호 참사라는 버거운 전장을 만났다.

세월호 취재 보도에서 한국 언론은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속보경쟁에 희생된 정확성, 피해자에 대한 배려 부족, 정부 발표와 취재원에 대한 검증 소홀, 대형재난에 대한 전문성 결여, 현장 기자와 본사 데스크의 불협, 각개약진에 따른 현장의 혼란…. 급기야 ‘보도 자체가 재난’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고, 기자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매도됐다. 정도를 지키려 애쓴 언론사들도 있으나 대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달 16일 한국신문협회 한국방송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등 5개 언론단체가 공동으로 재난보도준칙을 만들어 선포했다. 세월호 보도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이자, 자정기능의 징표이기도 하다. 준칙은 재난을 취재 보도할 때의 일반준칙과 피해자 인권 보호, 취재진의 안전 확보, 현장 취재협의체 운영, 언론사의 의무 등에 대한 기준을 담았다. 10개 언론 단체는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기자는 언론 5개 단체 재난보도준칙 공동검토위원장으로 준칙 제정에 관여했다. 그래서 걱정이 더 크다. 가장 자주 받은 질문이 ‘지켜지겠느냐’는 것이다. 대답이 궁하다. 다만,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지켜진다’는 수동적 표현보다 능동적 의지를 담아 ‘지킨다’고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한국 언론이 조금 숨을 돌렸다고 해서 이번 사건의 교훈을 망각한다면, 다음 처방은 없다.

‘안 지키면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는 말도 나왔다. 준칙에 최소한의 제재 규정이 들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강제성을 담보할 수 없다. 언론단체 간에 제재 수준을 둘러싸고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정리했다. 지키는 게 우선이고, 제재는 그 다음이라고. 순진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준칙은 원래 처벌이 목적이 아니다. 자율 준수가 전제다. 한국 언론의 수준을 묻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재난관리당국이 정보를 숨기거나 협조를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도 많았다. 일리가 있다. 그래서 준칙을 선포하며 정부와 재난관리당국에 4가지를 요구했다. 정확 신속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취재제한은 최소한으로 하며, 언론사들이 구성하는 재난현장 취재협의체의 요구를 존중하고, ‘재난상황 언론브리핑 매뉴얼’을 만들어 시행하라고 촉구했다. 정부는 언론단체의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한다. 언론도 정부가 제 역할을 하는지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그래도 걱정이 남는다. 군소 인터넷 매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1인 미디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깨진 유리창’ 이론이 역으로 기능하길 기대한다. 제도권 언론이 먼저 깨진 유리창을 온전한 유리창으로 갈아 끼운다면, 인터넷 매체나 1인 미디어들도 함부로 돌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돌을 던진다면 준칙이 아니라 관련법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이다.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준칙을 제대로 지키려면 누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가.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편집 보도국의 간부들이다. 절대, 현장기자도 언론사도 아니다. 편집 보도국 간부들이 현장 기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현장 취재협의체의 활동을 격려하며, 한발 떨어져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하고, 작은 특종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면 준칙은 힘을 받을 것이다.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교육이다. 언론사별로, 언론단체별로 주기적으로 준칙의 필요성을 숙지시키고 사후 평가도 해야 한다. 자주 입어 봐야 편한 옷이 된다. 이런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준칙은 언론단체들이 ‘처음으로 합의한 성과물’이라는 허명만 남긴 채 얼마 못 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질식할 것이다.

재난보도준칙은 단기훈련을 마친 신병과도 같다. 그런데도 곧바로 치열한 전장에 배치됐다. 언론계도 언론계지만 언론계의 오발탄에 피해를 보았던 민간인의 눈매도 매섭다. 신병은 제대로 훈련받았는가, 얼마나 버틸 것인가. 선임병과 지휘관, 병참에 그의 목숨이 달려 있다. 간부, 회사, 정부다. 더욱 중요한 사실 하나. 이 신병에게 전역은 없다. 영원한 현역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