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업체에 등록하려는 기사들이 27일 오전 1시경 서울 강남구 교보강남타워 앞에 만들어진 대리기사 모집부스에 들어서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리기사들에게 커피와 음료를 제공하며 기사모집도 하고 있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대리운전기사들에게 ‘운수 좋은 날’이란 술 취한 고객의 전화를 많이 받는 날이다. 많게는 하룻밤에 손님 10명까지 태우지만, 때로는 길바닥에서 시간만 죽인다. 대리기사들에게 ‘시간=돈’ 공식이 적용되는 이유다.
음주자들이 많아 ‘불금(불타는 금요일)’인 26일 본보 취재팀은 직접 대리기사 2명을 호출해 서울 곳곳으로 취재차량 운전을 맡겨 봤다.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대한 솔직한 의견도 들었다. 이들은 “우리는 화낼 힘조차 없다”며 “30분 기다리고도 두들겨 맞은 피해자 이모 씨(52)는 운수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손님 많이 기다리셨죠?”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 A 씨(58)의 목소리가 떨렸다. 콜센터에 전화한 지 채 3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손님의 항의가 걱정스러웠는지 얼굴엔 긴장한 기색도 역력했다. 슬쩍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대한 생각부터 물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답변부터 내놨다.
“대리기사들이 두들겨 맞는 이유는 ‘노동자’로 인정을 못 받아서 그래요.”
한국에서 대리운전은 음주운전 단속이 시작된 1980년대부터 시작됐다. 휴대전화, 스마트폰 앱 등 정보기술(IT)의 발달과 더불어 8조 원 이상 규모로 추산되는 대형 산업으로 성장했다.
더 골치 아픈 건 더욱 심해지는 경쟁이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할 수 있다 보니 많은 수의 퇴직자들이 대리기사로 변신했다. 3년 전 2만5000원을 받던 ‘서울 광화문∼여의도’ 요금은 이제 1만5000∼2만 원까지 떨어졌다.
○ 26일 오후 11시 50분: 여의도→교보강남타워
정장차림의 B 씨(59)가 5년 전 대리운전에 나선 것은 막내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8년 자신의 금속공장을 ‘말아먹고’ 대리기사로 나섰다. 그는 “의류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아내가 버는 돈을 합쳐야 겨우 생활이 가능할 정도”라고 말했다.
B 씨는 대리기사 폭행사건 뉴스를 보며 그간 들었던 욕설과 멸시를 떠올렸다. 특히 자기보다 서른 살은 어려 보이는 손님들에게서 “이 ××, 운전 진짜 못 한다” “나이 들어서 꼴좋다”는 식의 말을 들을 때는 참을 수 없어 시비가 붙기도 했다. B 씨는 “이번 폭행사건으로 대리기사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진 것 같아 솔직히 그 사람(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이 가장 원망스럽다”고 털어놨다. 긴 정체로 1시간 이상 걸린 광화문∼여의도 구간과는 달리 여의도에서 교보강남타워 사거리까지는 20분 걸렸다.
대리운전 ‘피크시간’ 막바지인 오전 1시가 넘어가자 교보강남타워 앞에는 지친 대리기사들을 위한 야시장이 들어섰다. 대리기사에게 필수품인 대용량 휴대전화 배터리를 파는 상인과 분식 노점, 건강식품 판매 상인까지 자리를 틀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대리기사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유흥가가 밀집해 손님이 많고 수도권 전역을 오가는 광역버스와 ‘대리기사 전용 불법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하루에도 200∼300명의 기사들이 모여 손님을 기다린다.
27일 오전 1시부터는 한 대리운전 업체가 천막을 쳐 놓고 대리기사를 모집했다. 직원 C 씨(55·여)는 “보통 하루에 10명 정도 상담을 받는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C 씨와 대화하는 1시간 사이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대리운전 구직자 5명이 이곳을 찾았다. C 씨는 “아무리 수익성이 떨어진다 해도 결국 기술 없는 사람이 할 일은 대리운전뿐이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 교통공단 ‘대리운전 실태’ 보고서… 8시간씩 주6일 일하고 月 150만원 벌어 ▼
8만7000명 종사… 하루 손님 5.5명
전국 8만7000여 명의 대리운전기사는 평균적으로 하루 8시간, 한 달에 24일을 일하고 하루에 5.5명의 손님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가 교통안전공단에 의뢰해 올해 3월 작성한 ‘자가용 자동차 대리운전 실태조사 및 정책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대리기사는 하루 평균 8시간을 일하지만 11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도 전체의 9.9%에 이른다. 대리운전 이용자는 하루 평균 48만 명에 이른다.
대리기사들이 꼽은 가장 큰 애로사항은 낮은 요금이다. 업체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가까운 곳은 1만∼1만5000원, 먼 곳은 2만 원 정도다. 한 달에 200만 원 안팎을 버는데 대리업체에 납입 수수료(수입의 20%) 떼이고 대리운전보험료, 교통비, 고객의 행선지와 요금을 확인할 수 있는 앱 사용료 등을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약 150만 원이다. 룸살롱 소속 대리기사는 수입이 월등히 높다. 대리기사 김모 씨(52)는 “서울 강남∼성남 분당 간 대리비는 2만 원이지만 룸살롱 대리기사는 6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대리기사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은 아직 없다. 새누리당 강기윤 의원이 2012년 9월에, 새정치민주연합 문병호 의원과 이미경 의원이 지난해 7월에 각각 대리기사의 지위향상과 권익보장을 위해 대리운전업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토교통위원회에 넘겨진 뒤 여전히 계류 상태다. 국토교통부 보고서에 따르면 대리기사의 80%가 “정부의 제도적 지원과 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